[취재 일기] 물러터진 북선박 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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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번 한번만 영해 통과를 허용했습니다. 차후 사태가 재발할 경우 정부는 강력히 대응할 것입니다. " 북한 상선의 제주해협 무단 통과로 긴급히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가 끝난 3일 오후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이런 정부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4일 오전, 북한 선박이 동.서해안의 북방한계선(NLL)을 동시에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군 당국은 말을 바꿨다.

"이번 NLL 통과는 어제 정부가 허용한 '한 차례' 에 포함된 겁니다. "

무해(無害)통항이 허용되는 제주해협 '통과' 와, 교전까지 치른 분쟁지역인 NLL '침범' 을 뭉뚱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날 오후 북한이 상선 한 척을 다시 제주해협에 들여보낸 사실을 접한 군 당국자는 할말을 일은 표정이었다.

이에 앞서 사태가 긴박히 돌아가던 3일 오후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핸드폰은 아예 꺼져 있었고, 그의 비서관은 "일요일이라 일찍 퇴근하셨다" 는 말만 되풀이했다. 물론 3월 이후 중단된 당국간 대화를 어떻게든 재개하려는 정부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튼튼한 안보에 바탕을 두겠다' 는 게 정부 대북정책의 기조라고 당국자들은 늘 국민에게 설명해 오지 않았던가. 이번 사태는 상당수 국민, 특히 보수층에 '안보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라는 의구심을 심어 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때문에 정부는 이런 시각을 감안, 의문점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게 정도(正道)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군 내부에서조차 '바다의 군사 분계선' 인 NLL이 민간 선박에 의해 어이없이 허물어진 데 대한 자탄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4일 오후에야 통일부 장관 명의의 대북 전통문을 그동안 북한의 '민간 기구' 라고 해오던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 앞' 으로 보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해양 문제를 다루는 데 국제법과 남북간 특수관계에 분명한 선을 긋는 냉철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는 박춘호(朴椿浩)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의 지적에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정부가 북한에 얕잡혀 피곤한 말바꾸기를 되풀이해야 하는 일을 피하려면 말이다.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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