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세상] 50년대 김구용 시와 한국인의 시적근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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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천하에 이런 일도 있나, 깨끗이 조각난 심장. 그런데도 죽지 않고 소위 문명을 생각한다" . 시인 김구용(金丘庸.79)씨가 1951년에 발표한 시 '노래' 전문입니다.

6.25로 물질과 정신이 초토화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래도 시인이, 시가 살아남아야 될 이유가 굳은 각오로 이 짤막한 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50년대 적잖은 시인들이 실존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로써 그래도 문명과 문화를, 인간의 품위를 지켜냈습니다.

49년 시단에 나온 김씨는 "감상의 미는 여백마저 없애버리는 사치에 지나지 않으며, 엄격한 생각으로 허영을 버릴 때, 시는 한 사람의 독자를 얻는다" 는 엄결한 자세로 시쓰기에 임했습니다.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결코 동양적.인간의 내면적 깊이를 잃지않으려는 그의 시는 어느 한 경향으로 평가되거나 분석되기를 거부하며 우리 시단에서는 그저 '난해시' 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김씨의 시세계를 다시 차분히 살펴보자며 그의 시를 정리한 책이 『풍미』 『뇌염』(솔출판사.각권 9천원) 두권으로 나왔습니다. 이 시집을 내놓으며 한 다음과 같은 편집자의 발언이 특히 눈길을 끕니다.

"김구용 문학이 제대로 평가되거나 평가의 시도조차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은 한국 문학의 제도적 문제점, 한국 문학의 미학적 외래성이나 편식성.부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 극명한 반증이라는 판단에서 이번 시집을 발간했다. " 즉 우리 문학의 잘못된 제도 혹은 부분이 한국 문학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겠지요.

이런 주장에 대해 적잖은 문인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혐의의 핵심으로 세대, 특히 60년대인 4.19세대가 거론되곤 합니다.

자유 정신과 서구 문학이론으로 학습된 젊은 문인들이 60년대 들어 문단에 속속 나와 세대를 형성한 후 그 앞세대를 소외시킨 것 아니냐는 혐의죠.

4.19세대 문학은 크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양대 바퀴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양대 이론에 들어맞지 않은 문학이면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민족의, 동양의 고전적 전통을 그 형식으로 이어받으며 거기에 상징주의.실존주의 등 서구의 정신을 융합해 넣은, 결코 한가닥으로 딱부러지게 규정할 수 없는 삶과 인간의 깊이를 추구했던 문학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그물에 걸려들기는 힘들죠.

그래 60년대 이후 소외 받은 50년대 문학을 살려보자는 것이 이번 시집 출판의 기획의도인 것 같습니다.

"서구 현대시와 동양의 선(禪), 노장(老莊)전통이 추호의 빈틈도 없이 하나로 융합해 문자 그대로, 거침 없는 자유자재, 풍류의 거대한 시적 너울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한국인의 시적 근원과 이상을 엿보게 한다.

" 김씨의 시에 대한 편집자의 평입니다. 그동안 한국문학은 '한국인의 시적 근원과 이상' 을 현실과 역사를 중시하는 리얼리즘이나 합리적 지성에 바탕한 모더니즘이 보아내지 못했다는 반성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창 일고 있는 서정주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한 논란도 여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니 그 연장선상에서의 치열한 대결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학의 잘못된 제도' 혹은 이념이나 이론의 신봉으로 한국문학을 외래성.편식성.부박성에 빠뜨리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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