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풍, 지금은 때가 아니라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민주당 내에 모처럼 참신한 자체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개혁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 최근 내놓은 요구는 안동수(安東洙) 전 법무부 장관 추천자 문책과 인사 시스템 개선으로 요약된다.

물론 이들의 궁극적 겨냥점은 대통령 국정운영 방식의 전면 전환이다. 그동안 당 밖에서야 이런 저런 지적과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당내에서 최고지도부를 향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처음이기에 귀추가 주목된다.

그런데 청와대와 당 지도부가 이들의 움직임에 대처하는 태도는 실망스럽다. 봉합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 오후부터 어제에 걸쳐 대상 의원들에 대해 "지금은 총재를 중심으로 당이 화합하고 단결해야 할 때" 라는 설득작업이 벌어졌다고 한다.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나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다' 고 한다면 도대체 언제 고치겠다는 것인가.

초.재선 의원들의 움직임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기간 준비돼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행동이 항명(抗命)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통령 보좌진의 문제까지 제기하고 나선 것은 그만큼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민심 이반(離反)의 심각성을 절감한 젊은 의원들이 "이대로 가다가는 정권 재창출은 물론 개혁마저 물건너간다" 는 위기의식 속에서 생존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비공식 라인에 의존한 인사정책' 에 대한 이들의 비판도 지난해 말에 나온 '권노갑 고문 2선 후퇴론' 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내부 비판이 살아 있다는 것은 민주당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청와대와 당 지도부는 소장파들의 이런 움직임을 괘씸하게 생각하거나 찻잔 속의 태풍으로 묶어놓으려 해서는 안된다.

이들의 요구를 수용,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인사와 국정운영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여권 내부의 이런 작은 개혁 요구도 수용하지 못하면서 상시개혁론만 외쳐대니 개혁 불감증이 생겨나지 않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