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션 와이드] 전남 보성 장인 이학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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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상. 하지만 새것이 생겼다고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살아 숨쉬는 그릇인 옹기. 서민들의 애환과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전통 용기다.전남 보성에서 전통 기법을 지키면서 9대째 독을 짓는 장인(匠人)을 만나봤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보성읍쪽으로 한시간 남짓을 달렸을까. 왼편으로 누런 보리밭 너머로 보성강 둑이 이어지고 오른편에 조그만 대나무 숲이 길가에 바짝 서 있다. 청죽(靑竹)사잇길로 열댓 걸음 내딪자 갖가지 모양의 옹기(甕器)들이 반긴다.

쌀 너댓 가마는 족히 들어갈 듯한 독과 배가 불룩한 항아리,둥글넓적한 아가리의 자배기,독 뚜껑 소래기 등등.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미력옹기'.

납작한 기와지붕에 토담으로 둘러쌓인 20여평의 독막,산자락을 기어오르는 듯한 재래식 가마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 이학수(李學洙 ·48)씨는 "제가 9대째인데 이곳에서 옹기를 구운 것은 1950년부터니까 반백년 밖에 안됐어요.우리 집안 옹기 역사의 끝자락에 불과한 셈"이라고 말했다.

李씨 조상들의 옹기 만들기는 강진에서 시작됐다.6.25 때 공비들을 피해 이곳에 지금의 가마를 앉혔다.

옹기가 플래스틱·스테인레스 그릇한테 치이기 시작한 60년대 전까지는 옹기점으로부터 선금을 받고 일할 만큼 돈벌이도 괜찮았다.

아버지 이옥동(李玉童·작고)씨는 숨지기 4년 전인 90년에 동생(李來元씨 ·2000년 81세로 타계)과 함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옹기장)가 되는 '대접'도 받았지만 외아들에겐 흙일을 시키지 않았다.

옹기 일은 자신의 대에서 끝내야 한다며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서울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4년 J대 국문과에 들어간 학수씨는 한 학기 만에 가업을 잇겠다며 보성의 독막으로 되돌아왔다.

"처음엔 독막에 발을 못 들여놓게 하시면서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습니다.6개월 가량 지난 후에야 옹기를 달구지에 싣고 마을 등을 돌아다니며 파는 일부터 시키셨습니다."

제대로 된 옹기를 빚으려면 기술보다 실제로 쓰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원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숙부마저 지난해 작고해 혼자서 미력옹기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인부 4명의 월급조차 버겁다.일반 옹기와 달리 전래의 잿물 옹기와 수작업을 고집하다보니 수지를 맞추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광명단 유약을 쓰면 값이 싸지고 옹기의 빛깔이 번지르르 해져 돈벌이가 지금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하지만 장인(匠人)의 양심이 허락치 않아 그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납 성분이 섞여 있어 사람 몸에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력옹기들은 일반 옹기에 비해 값이 보통 두 배.재래시장 등으론 파고 들 수 없고,주로 전통공예품 판매장이나 백화점 전시판매 행사 등을 통해 나가고 있다.

그는 아파트생활 가정의 증가 등 시대 변화에 맞춰 제품의 종류와 크기,모양에 변화를 많이 주고 있다.

냉장고 안에 층층이 넣을 수 있도록 납작하게 만든 단지와 불룩한 배를 없애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항아리,아기자기한 다기(茶器) ·주전자 ·화병 등도 생산한다.

이같은 변신에도 불구하고 3대째 쓰는 길이 24m짜리 재래식 가마에 불이 지펴지는 것은 한 해에 고작 3∼4번.한 가마에 5백∼1천점을 구워도 상품가치가 있는 것은 절반가량에 불과해 1천여만원 챙기면 다행이다.

수(手)작업 대신 석고 틀로 찍어 가스 가마에서 구워내고 있는 대접 ·접시 ·컵 따위를 합쳐도 연간 생산량은 3천여점에 그친다.

"돈벌이가 신통치 않아 갈등을 많이 느끼곤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 것을 지킨다고 자부하고 대대로 이어온 맥에 순응하게 되니 마음이 편합니다."

그는 97년부터 2년 동안 단국대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는 등 이론적 토대도 쌓아 장흥의 남도대학에 출강도 한다.

2남1녀를 두고 있지만,옹기 일이 자신의 대에서 끊기지 않을까 걱정해온 9대 옹기장이는 요즘 10대까지는 이어질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돼 기쁘다.

옹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군 복무 중인 큰 아들 그림(24)씨가 "누군가는 대물림 받아 이어갈 것"이라고 말하곤 해서다.

李씨는 "우리 옹기가 지금은 장식용으로 많이 나가지만 생활용기로서도 다시 제 빛을 볼 날이 올 것이고,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편리하고 유용한 것들을 개발하는 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보성=이해석 기자

<미력옹기는…>

미력옹기는 형상을 만들 때 호남지방 특유의 쳇바퀴타래(일명 판장질)기법을 사용한다.

흙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방망이질을 해 판자 모양으로 넓게 편 뒤 물레 위에 얹어 먼저 밑 판을 뜬다.그리고 길다란 흙판을 둘러 붙여 벽을 만들어 대충 그릇의 형상을 잡는다.

이어 안쪽엔 도개를 대고 바깥쪽에선 주걱 같은 수레로 두들기면서 물레를 돌리며 매만지다보면 두께가 고르고 반듯한 모양이 된다.

계속 물레를 돌리며 표면을 긁어 매끄럽게 한 뒤 물을 묻힌 가죽으로 주둥이 모양을 잡으면 그릇의 형태가 완성된다.

쳇바퀴타래기법은,가래떡처럼 길게 늘인 반죽을 돌려 쌓아 형상을 짓는 경기·충청지방의 둥글타래기법보다 대(大)독같은 큰 그릇을 만들거나 두께를 얇게 해 가벼운 그릇을 만들어내는 데 유용하다.물기가 적은,된 반죽을 쓸 수 있어 잘 주저앉지 않기 때문이다.

생(生)옹기는 3∼4일간 그늘에서 말린 다음,소나무를 태운 재와 철분이 많이 섞인 약토로 만든 잿물을 입히며,손으로 훔쳐 난이나 용수철 무늬 등을 넣기도 한다.

이같은 방식으로 하나하나 만든 것들이 5백∼1천개 가량 모아지면 가마 안에 차곡차곡 쌓은 뒤 불 때기가 시작된다.

처음엔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서서히 때다 온도를 올려 1천2백도로 올라갈 때까지 7일간 밤낮으로 땐다. 길이 24m의 가마 안에 고루고루 불기가 가게 하자면 가마 위에 50㎝ 간격으로 뚫어 놓은 구멍에도 장작을 넣어 줘야 한다.

아궁이 ·굴뚝 등을 흙으로 막고서 3일간 열기를 식혀 가마 문을 열면,손으로 튕길 때 맑은 쇳소리가 나고 숨은 쉬되 물기는 통하지 않은 옹기가 탄생한다.

그러나 터지거나 갈라진 것,퍽퍽거리는 것을 골라내고 나면 실제 세상 빛을 보는 옹기는 전체의 절반도 안된다.

<옹기는…>

옹기는 오지그릇과 질그릇으로 나뉜다.

오지그릇은 잿물(오짓물)을 발라 구워 표면이 반질하게 윤이 나는 것들을 말한다.물기는 통하지 않지만 공기가 통하는 게 특징이다.

질그릇은 잿물을 생략해 겉이 꺼칠하고 물이 새지는 않지만 배어난다.통기성이 좋아 곡식 등 마른 것을 보관하는 데 쓰인다.

옹기라고 하면 보통은 오지그릇만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얀 흙으로 만든 자기가 부유한 집안의 장식용 등으로 용도가 제한적이었던 반면 옹기는 부엌살림부터 화장실의 변기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정의 일상생활에 두루 사용됐었다.

그러나 가볍고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스테인레스그릇이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우리의 곁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옹기장이들이 빛깔을 좋게 하고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기 위해 잿물 대신 인체에 유해한 광명단을 썼던 것도 옹기의 쇠락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전통을 되찾는 붐이 일면서 더 이상의 홀대는 피할 수 있게 됐다.근년 들어서는 '숨쉬는 그릇'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커졌다.

옹기의 우수성과 신비는,눈엔 보이지 않지만 미세하게 무수히 나 있는 구멍의 통기성(通氣性)에 있다.

플라스틱제품 등과 달리 안과 밖의 공기가 통하면서 물이나 음식이 썩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쌀 등 곡식을 넣어두면 눅눅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통기성을 확인할 수 있다.더욱이 음식의 맛을 유지시켜주고 냄새 등을 없애는 것도 옹기의 장점 중 하나다.

또 옹기는 세월이 흐르면 다시 분해돼 흙으로 돌아가는 환경 용기라는 점에서 대자연을 역행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온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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