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명분과 현실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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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린 너무 원리주의자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현실의 불가피성보다는 원리원칙을, 실사구시(實事求是)보다는 윤리.도덕을 중시하는 '버릇' 이 있다.

원리원칙, 얼마나 좋은 말인가. 이 세상 복잡사가 원리원칙과 명분과 윤리에 따라 저절로 해결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원리원칙을 중시하면서 그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날 때 중지를 모으고 사회적 합의를 일궈내는 게 민주사회의 시민역량인 것이다.

*** 배아복제 ·친양자법 논란

지금 우리 사회엔 원리원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몇가지 중대사가 국민적 합의를 기다리고 있다. 인간배아 복제연구, 친양자권(親養子權), 기여입학제가 그것이다. 배아복제 연구는 인간의 생명연구와 직결된 중대 사안이다.

친양자권이란 이혼모 자녀의 인권문제다. 기여입학제는 어려운 대학재정을 살리는 대안 중 하나다. 여기서 배아복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윤리원칙 때문에, 친양자권은 남성위주의 호주제라는 전통윤리와 법 때문에, 기여입학제는 교육기회의 평등과 공정성이라는 원칙 때문에 평행적 논의만 일삼거나 논의 자체가 되지 않는 답답한 현실이다.

인간의 생명은 결코 인위적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배아단계도 사람이다. 인간을 연구도구로 삼는 어떤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게 배아복제 반대논리다.

인간의 존엄성을 허물자는 게 아니라 인간의 난치.불치병을 배아복제 연구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인간생명과 존엄성을 더 높여 보자는 연구가 생명공학 연구 아닌가. 그것도 인간복제를 위한 개체복제가 아닌 체세포 복제연구마저 금지해 생명공학 연구가 한치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든 게 생명윤리기본법 시안이다.

한창 잘 나가던 생명공학 연구가 이 시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그대로 주저앉을 위험에 빠져 있다. 추상적 위험이 있다고 무조건 금지한다면 문제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과 시도도 할 수 없다는 게 관련 연구자들의 하소연이다. 이들의 이런 호소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인가.

얼마전 작가 공지영씨가 '비장한' 각오로 한편의 기고문을 중앙일보에 실었다. 작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재혼을 했다.

하지만 법률상 지금의 아빠와 아이는 그저 동거인일 뿐이다. 아이가 아빠와 성이 다른 걸 알까봐 학교도 먼곳으로 보냈다. 재혼 후 아이를 낳았다. 형제간 성이 다른 걸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이 다른 두 아이의 상처를 감싸줄 수 있다면 그녀는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공문서를 위조해 아이의 출생신고를 다시 해볼까 하는 절박한 생각도 했다.

이런 재혼여성이 16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의 시선에 주눅들고 교실에서 출석을 부를 때마다 애비 성과 다른 아이로 손가락질 당하는 이 반인권적인 일을 없애줄 친양자법은 '정체성에 혼돈을 줄 수 있는 성씨 바꾸기는 안된다' 는 반대로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이 아이들의 상처와 그 어머니들의 애절한 호소를 호주제 원칙에 묶여 언제까지 방치만 할 것인가.

나는 오래 전 기여입학제를 반대한 적이 있다. 교육기회 균등의 원칙과 수요자 부담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정으로 바뀌었다. 농어촌 자녀와 소년소녀가장 등에 특례입학을 허용함으로써 원칙의 일부가 이미 무너졌다.

수요자 부담원칙은 대학생들 스스로 등록금 동결투쟁을 줄기차게 해옴으로써 수요자인 학생들에게 부담을 지울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대학의 질적.양적 발전을 위해 누가 돈을 대야 하나. 정부가?

초.중등 교육투자를 하기에도 지금의 교육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 대안이 기여입학제다.

***기여입학제 논의 해보자

기여입학이란 게 하늘에서 떨어진 별난 존재가 아니고 세계 여러 곳에서 이미 시행 중인 제도다. 그렇다고 뒷구멍 입학을 법적으로 허용하자는 게 아니다. 물적.비물적 기여를 한 인사의 자녀에게 입학의 우선순위를 대학의 투명한 기준에 따라 높여주자는 정도다.

그것도 한국적 정서를 감안해 정원외 극소수로 제한하자는 조심스런 접근이다. 교육기회 균등의 원칙을 중시하면서 1인의 정원외 기여입학으로 1천, 1만명의 수혜자가 생겨난다면 이를 거부할 이유가 있나. 원칙을 허물자는 게 아니라 원칙을 준수하면서 당면한 대학재정의 출구를 마련하자는 고육책이다.

교육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이라고 밤낮 떠들면서 현실적 대안에 대해선 국민정서를 내세워 정부가 비켜간다면 이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원칙의 테두리에서 변화와 변칙의 지혜를 아우르며 합의를 일궈내는 사회라야 미래지향적 사회가 될 수 있다.

권영빈 본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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