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7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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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75. 코라시안 (Korasian)

1993년 아시아개발은행(ADB)을 그만두고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환경 분야의 NGO 활동이었다. ADB 부총재 시절 나는 하나의 계(유니트)에 불과했던 ADB의 환경 담당 파트를 부 규모로 확대하는 데 앞장섰다. ADB의 다른 직원들이 NGO 사람들을 잘 안 만나려고 할 때도 내 방은 항상 개방돼 있었다.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한 번은 "내년이면 내가 입장이 바뀌어 당신들쪽에 앉아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 했더니 이들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그린피스쪽에서 나더러 "귀국하면 그린피스의 한국 책임자를 맡아 달라" 는 제안을 해 오기도 했다. 나는 "그린피스 하면 시위가 먼저 떠오르는데 나는 시위에 앞장설 사람이 못 된다" 고 거절했다.

ADB 본부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에 이어 중기개발기금 주석으로 홍콩에 3년여 근무하는 동안 나는 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에 새삼 눈뜨게 됐다. 우리나라의 살 길은 동북 아시아의 허브가 되는 것이다. 인천공항이 동북아의 허브 공항이 돼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하는 얘기이다.

한반도는 앞으로 생산기지이기보다 유통과 물류의 허브가 돼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인천공항에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나갔다가 나는 99년 4월 파리 샹제리제 거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에 앞서 98년 봄 연세대 경법대에 초빙교수로 나가 '아시아 속에서의 한국' 을 주제로 강의할 때 나는 "우리나라는 세계화.국제화도 아시아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아시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세계화다. 아시아 속의 한국인이라는 뜻으로 코라시안(Korasian)이라는 말도 처음 만들어 썼다.

과거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독에 광원.간호사로, 중동에 근로자로 활발하게 진출했었다. 그러나 그 시절엔 그쪽 나라들의 인력 수요에 맞춰 우리가 송출하는 식이었다. 지금 동남아 근로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3D 업종을 담당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뻗어나가는 방식이 돼야 한다.

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중국의 화교는 5천만명을 헤아린다. 한민족은 재중동포.재일동포를 포함해 5백만이다. 인도계는 세계적으로 1천3백만에 이르지만 오대주에 널리 퍼져 있다. 일본계는 세계적으로도 70만명에 불과하다.

아시아 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가 1천만에 이르면 우리가 중국계 다음 가는 민족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한민족이 머지 않아 1억에 도달한다고 볼 때 1천만이 아시아권에서 산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다.

아시아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중국계와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좋든 싫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러자면 북한과도 협력해야 한다. 앞으로 남쪽 혼자서는 잘 살 수가 없다.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이 힘을 합치고 인도가 가세하면 아시아가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나는 본다. '新동양 3국론' 이랄까? 물론 지난 시대처럼 일본이 앞장서는 방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홍콩에 있는 동안 나는 중국에 투자를 했었다. 그 때 중국의 자본은 한국의 재벌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의 2세 재벌 총수들에게 나는 좁은 땅에서 문 닫아걸고 독점 경쟁을 할 게 아니라 아시아를 무대로 중국 자본과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동서문화의 융합이란 일본문화와 미국문화의 결합이 아니다. 나는 중국문화와 유럽 문화의 만남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

우리나라는 또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베네룩스 3국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네덜란드는 물류에 강하고 룩셈부르크는 금융 강국이다. 벨기에는 작은 나라지만 지역안보 차원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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