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수도자들 '영성·문화운동' 나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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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가톨릭의 수도회는 불교의 선원(禪院)과 같다. 구도에 전념하는 수도자들이 세속에서 비켜나 수도생활을 하는 곳이다. 당연히 외부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14일 오후 6시 가톨릭의 대표적 수도회인 성(聖)베네딕도 수도회 서울 수도원의 문이 열렸다.

서울 장충동 대로변에서 살짝 벗어난 곳, 붉은 벽돌에 담쟁이가 싱그러운 수도원 건물은 이국적이다. 쪽문을 지나 붉은 벽을 따라 들어서자 잘 정돈된 정원이 나타난다.

육중한 수도원 건물이 도시의 소음을 차단, 작은 잔디밭 정원은 외진 시골의 수도원처럼 고즈넉하다. 정원 입구에는 미사에 사용되는 화이트 와인과 샴페인, 그리고 배즙으로 만든 음료가 손님의 손길을 기다린다. 중간중간 선승(禪僧)처럼 삭발한 검은 망토의 수도사들이 손님을 맞이한다.

50여명 손님 가운데 가톨릭의 거물들이 눈에 띈다. 김수환 추기경과 조반니 모란디니 교황청 대사 등 가톨릭 최고위 성직자, 원로 신학자 정의채 신부와 베네딕도회 본부인 왜관수도원의 김구인 원장. 평신도들도 쟁쟁하다. 시인 김남조.김형영씨, 소설가 박완서.최인호씨 등 문인. 미술계의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학계의 조요한 전 숭실대총장과 이원순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

작지만 묵직한 이날 모임은 수도원이 세속을 향해 '영성.문화 운동' 을 선포하고 세상으로 나서는 자리다. 이름하여 '리부스(Rivus)운동' . 리부스는 라틴어로 '시냇물' , 곧 '생명의 원천이자 삶의 원형' 이란 의미다.

리부스 운동은 '시냇물이 대지를 적시고 강을 정화하듯 아름다운 영적 가치를 지닌 문화운동으로 인간의 꿈과 가치를 살려내자' 는 운동이다. 벽돌벽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수도회가 타락의 길을 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선 종교문화운동이다.

모임의 주최자는 서울 수도원장인 조광호(55)신부다. 화가이기도 한 조신부는 사회와 격리된 수도의 길을 택한 수도자들이 거꾸로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묻자 "영성과 문화운동에 수도자들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

조신부는 "우선 수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영성이 풍부하기에 영성 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오늘날과 같이 정신적으로 황폐한 시대, 종교가 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도자들이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 말한다.

특별히 베네딕도 수도회는 중세 이후 유럽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왔다는 자부심에서 문화운동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다.

사실 조신부는 이미 지난 2년간『들숨날숨』(http://www.dsum.co.kr)이란 월간 잡지를 발행하면서 노하우를 익혔다. 가톨릭계의 어른들을 모셔 리부스 운동을 천명하는 행사를 벌인 것도 이런 경험에서 자신감을 얻은 덕분이다. 이날 모임은 『들숨날숨』창간 2주년 축하자리를 겸했다.

구체적인 영성.문화운동의 방법은 "건강한 문화 소프트웨어의 제공" 이다. 가톨릭적 명상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도 수도자의 경험을 나눠주는 것.

각종 문화공연을 평가하고 추천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좋은 문화' 를 널리 알리고, 필요한 경우 직접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 등등. 이날부터 영성.문화운동을 위한 기금모금이 시작됐다. 사무국(02-2273-4180)은 우선 『들숨날숨』 편집부에 만들었다.

메조소프라노 김청자씨가 부르는 '아베 마리아' 가 조용히 수도원의 뒤뜰에 울려 퍼졌다. 수도회의 모임이라 요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천5백년 전 바위동굴로 들어갔던 수도회가 세상으로 걸어나오는 의미있는 모임이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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