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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성찰적 근대화론' 의 기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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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80년대 중반 체르노빌 핵 발전소 사고는 서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막연하게 신뢰했던 현대 사회의 안전 체계가 계산 불가능한 위험에 노출된 것이었음을 확인한 순간 문명의 이름으로 도처에 깔려 있는 생명의 위협에 대해 사람들은 전율했다.

울리히 벡의 『위험 사회』는 바로 그 시점에서 '현대 문명이 도달한 지점이 과연 어디인지' 를 예리하게 파헤쳐 '제도 과학에 유성의 충돌과 같은 충격을 안겨준' 명저로 각광을 받았다.

이 책에서 벡은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삶에 대한 위협" 인 '위험' 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성' 안에 내재한 자동적 결과임을 날카롭게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과 산업문명은 자연과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제조된 불확실성과 위협' 을 점점 증가시켜 왔다. 문제는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해 우리의 지식이 지극히 불완전하고, 위험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위험은 전지구적으로 도처에 깔려 있는데 위험의 내용과 범위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벡이 '위험의 덫' 이라고 부른 위험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회적 행동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묶어 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을 전면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시스템들을 비록 불완전하고 다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치적.사회적 결정들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후자의 과정, 즉 근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위험한 결과들에 대한 새로운 대응 체계를 사려 깊게 만들어가는 '이미 진행된 미래' 를 벡은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로 명명했다.

*** 미시.하부정치의 확산

80년대 벡의 작업이 위험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오늘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자기이해에 초점을 두었다면, 90년대의 벡은 전환기의 세계를 체계적.거시적 수준과 개인적.미시적 삶과 행위의 수준에서 함께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열중했다.

그의 생산성은 놀라울 정도여서 거의 일년에 한 권의 책을 낼 정도로 왕성한 집필욕을 보이고 있는 데, 그의 저서들은 난해한 이론서라기 보다는 시대를 사는 지혜를 알려 주는 잠언록과 같은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폭넓게 사랑을 받고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벡의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탐험은 영국의 대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와 스코트 래시의 작업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90년대에 와서 이들은 서로의 이론이 매우 근접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찰적 근대화』라는 공저는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우선 이들은 비록 쓰임새는 약간 다르지만 성찰성이란 개념을 시대의 문제를 풀어갈 새로운 화두로 삼고 있다.

여기서 성찰성이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현대의 모든 제도들과 시스템 속에 자기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기제인 성찰성이 내재화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더욱 개인화하고 있는 삶의 조건 속에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 기획이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근대화할 수록 사회 내에 자신의 존재조건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많이 형성되며, 그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또한 커진다.

그리하여 성찰적 근대화란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근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근대를 봄으로써" 근대를 더욱 '인간답고 아름다운 근대' 로 만들자는 기획인 것인다.

다만 이러한 기획에 있어 벡이 구조의 자기 창조적인 변화에 좀더 주목하고 있다면, 기든스는 지식과 전문가 체계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며, 래시는 삶의 심미적 차원이 자아내는 새로운 지평에 강세를 주고 있다.

이들에게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라는 물음과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라는 물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물음들에 다가서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투명한 길을 보물 찾듯 찾는 과정이 아니다. 불확실성으로 휘감긴 '후기 근대' 는 모든 투명성이 종말을 고한 시대이다.

기존의 좌파처럼 사회주의라는 투명한 길을 전제로 하고, 특정한 지식에 의존해 사회를 가공하려는 사이버네틱 모델로는 적절한 치유책들을 발견할 수 없다.

이 경우 전체주의의 위험 수위는 크게 높아진다. 반대로 계획경제에 대한 시장의 승리에 감격한 나머지, 하이예크의 말대로 역사가 만들어낸 최선의 자생적 질서인 시장에 경외심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시장의 논리로 풀라고 권유하는 신자유주의는 '전지구적인 브라질화' 또는 '2대 8의 사회' 에 대한 방임으로 일관한다.

이들 역시 시장을 투명한 질서로 보는 나머지, 근대화의 유산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위험들과 대면하는 상황을 볼 수가 없다.

*** 시민.대화민주주의 강조

벡 등에게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정치의 혁신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자아 실현에서부터 구조 개혁에 이르기까지 '투명한 길' 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치적 결정을 기다리는 영역은 급속히 늘어난다. 가족이나 성.기술.직업.라이프 스타일 등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영역까지도 이제는 정치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이데올로기.종교.문화를 포함해 전통의 이름으로 자신을 보존하던 모든 것들이 탈(脫)전통화되고 재(再)전통화(새로운 관행과 제도로 굳어지는 것)되는 과정에서 정치는 일상화되고 있다.

이것을 기든스는 '생활정치' 라는 개념으로, 벡은 '하부 정치' 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양자 모두 성찰적 근대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다양한 영역에서 그 영역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기 위해 대화하고 협상하는 데 터잡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벡에게 이것은 여러 행위 주체들이 참여하여 협상하는 원탁 모델의 시민민주주의로, 기든스에게는 고도로 발달한 전문가체계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대화민주주의로 상정된다.

래시에게 이것은 세계 내 존재들이 위험 환경 속에서 서로를 어떻게 보살피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 삶을 둘러싼 환경의 복잡성과 위험을 심미적으로 신장시키는 문제로 제기된다.

세밀한 수준에서는 이론적 차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꿈의 물질적 근거를 현실 안에서 찾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현실주의이다. 따라서 이 세 사람의 '성찰적 근대화론' 은 세계화 시대의 사회학적.정치학적 상상력을 넓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고전이 되고 있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사회학

*** 울리히 벡

<약력>

▶1944년 독일 슈톨프 출생. 뮌헨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뮌헨대와 런던정치경제대 교수를 겸하고 있음.

<번역서>

▶위험 사회(새물결, 97년)

▶성찰적 근대화(기든스.래시 공저, 한울, 97년)

▶정치의 재발견(거름, 98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99년)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생각의나무, 99년)

*** 앤서니 기든스

<약력>

▶1938년 영국 런던 출생. 헐대학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음.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거쳐 현재 런던정치경제대 학장으로 있음.

<번역서>

▶포스트모더니티(현상과 인식, 93년)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한울, 97년)

▶제3의 길(생각의나무, 98년)

▶현대성과 자아정체성(새물결, 98년)

▶현대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새물결, 99년)

*** 스코트 래시

<약력>

▶1945년 미국 시카고 출생. 미시건대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치경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음. 랭카스터대 교수를 거쳐 현재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 교수 및 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음.

<번역서>

▶기호와 공간의 경제(현대미학사, 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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