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선거법으로 지역감정 고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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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앙선관위가 9일 내놓은 선거법과 정치자금법 개정안은 의욕만 앞서 부작용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특히 지역감정에 의한 투표행위를 막는다면서 선거일 1백80일 전부터는 여론조사를 발표.보도할 때 지역별.유권자 출신지별.씨족별 지지도를 공표할 수 없게 한 것이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다며 연간 3억원 이상의 법인세를 내는 기업에 대해 법인세 1%를 의무적으로 선관위에 기탁토록 한 대목은 대표적인 탁상공론에 속한다.

지역감정에 따른 선거양상을 겨우 선거법 조항 하나를 고쳐 막아보겠다는 것은 한심한 발상이다. 온갖 묘책이 나와도 풀지 못한 것이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다. 물론 선관위가 이런 궁여지책을 마련하게 된 심정은 이해가 간다.

내년 실시될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에서도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릴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여야는 이미 영남 대 비영남 또는 호남 대 비호남 구도로 선거판을 짜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지역기반을 가진 대표적인 정치인인 3金씨는 내년 대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치열한 암중모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의 출신지별 지지도를 발표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역감정에 의한 투표행위를 막을 수 있겠는가.

또 선거홍보물에 후보자와 가족의 원적지.본적지.출생지.성장지에 관한 사항을 게재하지 못하게 한다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정당과 후보들은 온갖 방법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려 들 것이다.

또 실제로 이런 엉성한 법망을 피해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규제는 오히려 여론의 조작과 왜곡을 부추길 뿐이다.

법인세의 일정 비율을 선관위에 기탁토록 하는 방안도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크다. 이 방안은 야당의 주장을 선관위가 수용한 것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해 3억원 이상의 법인세를 낸 8천개 안팎의 기업이 법인세의 1%를 정치자금으로 낼 경우 6백억~7백억원이 된다고 한다.

이는 지난해 기업들이 정당과 정치인 후원회에 낸 후원금과 비슷한 액수라고 한다. 후원금으로 낼 돈을 '법인세의 1%' 로 대체해 양성화하자는 게 선관위의 논리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런 제도를 채택한 국가가 없는 데다 준조세를 없애자면서 기업에 의무적으로 정치자금을 내라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얘기다. 더구나 이런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음성적 정치자금 수수는 전혀 줄어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선관위 의견 중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을 '선거기간 개시일부터' 에서 '선거일 7일 전부터' 로 축소한 것은 유권자에게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또 시민단체가 낙선운동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을 사실상 열어놓고, 정치 신인들이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를 조금이라도 넓혀 놓은 것은 잘 한 일이다. 선관위의 개정안이 다음주 국회 공청회를 거쳐 여야의 정치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과정에서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손질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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