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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닮아서 싫어했던’ 2차대전의 영웅 패튼과 몽고메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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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그들답지 않게 마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패튼(왼쪽)과 몽고메리.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흘렀다. 패튼의 진주 손잡이 콜트 권총과 몽고메리 특유의 전차병 베레모가 보여주듯이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남의 이목을 끌 줄 알았다. 브래들리 장군(가운데)은 두 사람 사이에서 좀 더 차분한 지휘 스타일을 구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1885~1945)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윤회와 전생을 믿었던 특이한 군인이다. 그는 자신이 트로이 목마를 건설하는 그리스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카이사르 밑에서 보병군단 사령관이었고, 제3차 십자군원정에서 사자심왕(獅子心王) 리처드와 함께 싸웠으며, 나폴레옹 휘하의 사령관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진주로 장식된 권총을 차고 줄담배를 피우며 악을 쓰듯 명령하는 그는 병사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존경했다.

1942년 8월 윈스턴 처칠에 의해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 제8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버나드 몽고메리(1887~1976)는 엘 알라마인 전투(1942년 11월)에서 독일의 롬멜을 이집트 밖으로 몰아냈다. 항상 신중하고 완벽한 전략가였던 몽고메리는 행동에 옮기기 전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해 동료 연합군 사령관들을 짜증나게 했다. 그는 철저한 사전준비, 세심한 정보, 치밀한 조직이 성공적 전투 수행의 핵심이라고 강조했고 이러한 방침으로 느리긴 하지만 확고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패튼과 몽고메리는 연합군의 가장 우수한 두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의 전형인 몽고메리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던 패튼의 관계는 냉랭했다.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립은 시칠리아 침공계획인 ‘허스키 작전’(1943년 8월)에서 시작됐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전인 이 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자신이 팔레르모로 향하는 동안 패튼을 꼼짝 말고 있게 해달라고 연합군 지휘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몽고메리가 전공을 독차지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패튼이 아니었다. 패튼은 몽고메리가 강조해온 공군 지원, 충분한 정보, 측면 보호 등을 모두 배제한 채 부대를 이끌고 곧장 팔레르모로 진격해 6일 만에 점령했다. 팔레르모 점령은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몽고메리를 격분시켰다. 둘 사이의 경쟁은 이제 개인적 감정이 되었다.

브래들리 장군(1893~1981)은 “패튼은 몽고메리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마 자신과 너무 닮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같은 부류였다.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이 가장 훌륭한 장군이라고 확신했다. 상대방을 끔찍이도 싫어했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나란히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대립과 긴장이 넘치지만 이 모든 갈등이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믿고 싶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