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재기자가 본 평양] "미국 탓에 북남 멀어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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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남관계가 잘 되어가다 미국 때문에 이렇게 됐다. 미국이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고 방해만 하고 있다. "

북측 안내원 한웅희(53)씨는 기자가 최근 주춤하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해 묻자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평양외국어대에서 13년째 교편을 잡고 있다는 박상용 교수는 "50년간 미국에 의해 피해만 받았다. 올 들어 북남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다 미국 부시 정권 탓" 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들은 현재 북한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인식을 엿보게 했다. 평양에서 만난 일반 주민들도 노골적인 반미(反美)감정을 드러냈다.

이들 중에는 간혹 남한에 대한 불만도 빼놓지 않았다. 한 북측 관계자는 "지난해 북남합의(6.15 공동선언)에 부합되지 않는 한.미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 며 기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장면1. 3일 낮 12시30분-평양 모란봉 제1고등중학교.

학교를 찾은 기자단에게 50대 여자 교장선생님은 "우리 학교는 1954년 개교한 학교로 평양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공부하고 있다" 고 소개했다. 안내원은 시드니 올림픽 유도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계순희 선수가 다녔던, 평양에서도 중산층 이상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라는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온검출 과학실험을 하고 있는 교실을 방문하니 탁자 위에 낡은 실린더 몇개와 약품 몇 종류가 눈에 띄었다.

이 학교에 5개나 있다는 컴퓨터실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컴퓨터 교육 측면에선 달랐다. 교실에 들어서자 한 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축하합니다' 라는 북한 노래를 최신형 컴퓨터로 들려주며 환영했다.

장면2. 2일 오후 11시50분-양각도 호텔.

기자단은 대동강 근처에 있는 양각도 호텔 카지노장을 찾았다. 안내원은 "밤이 늦었으니 20분만 구경하자" 고 했다.

안내원이 동행한 경우에는 기자들의 외출이나 사진 촬영에 제약이 없었다.

남한 기자단을 담당한 안내원은 "만약 활동을 제한했다가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기자들의 활동을 제한하겠느냐" 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밤거리에서 영업을 하는 곳은 이곳과 고려호텔 가라오케 뿐이라고 안내원은 귀띔했다. 이 가라오케의 입장료는 25달러인데, 북한에선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평양시내는 여전히 전력난이 심각한 듯했다. 평양의 밤거리는 김일성 벽화를 비추는 불빛만 희미하게 빛날 뿐 온통 유령도시로 변해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모내기철을 앞두고 양수기를 돌릴 기름조차 부족한 실정이라고 털어놓았다.

기자가 취재를 끝내고 평양을 떠날 때 순안공항까지 나온 안내원은 "북남 모두 서로 좋은 면을 보도록 노력하자" 고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평양=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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