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저금리의 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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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S그룹 전무로 있다가 2년여 전 퇴직한 어느 선배는 얼마 전부터 바깥 출입을 딱 끊었다. 부인이 "제발 좀 나가라" 고 해도 종일 두문불출이다.

"그래도 지난해에는 퇴직금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친구나 후배를 만나 소주라도 한 잔 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그나마도 여유가 없다" 는 얘기다. 그래서 아예 안나가는 게 그나마 '품위' 를 덜 잃는 방법이라고 하소연한다.

*** 퇴직금 생활자들 죽을 맛

다른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다. 퇴직하고 노는 친구들끼리 가끔 비용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으로 술과 식사를 즐기는데, 하루는 한 친구가 겸연쩍어 하며 이런 말을 하더란다. "나는 술 한 잔도 안마셨는데…. " 체면 불구하고 술값 한푼이라도 아껴야겠다는 것이었다.

왜 안하던 짓 하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이자가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집사람이 용돈 깎았다" 고 대답하더란다. 저금리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이런 새로운 풍속도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전에는 가끔 골프장을 찾던 사람들도 요즘은 잇따라 산이나 기원 또는 동문회 사무실 등으로 발길을 돌린다.

급속한 금리 하락은 특히 40~50대 퇴직생활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업.기업인 또는 은행돈 빌린 사람은 좋은지 몰라도 직장에서 조기 퇴진당한 후 퇴직금에서 나오는 이자로 생활하고, 자식 공부시키고, 노후까지 대비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요즘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기껏 5~6%대.

1년 전의 절반 수준이다. 그나마 세금 떼고 나면 1억원 넣어놔야 월 40만~50만원 손에 쥐기 힘들다. 3억원을 넣어놔도 - 이 정도 현금을 가진 퇴직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지만 - 생활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치솟는 물가를 감안하면 실질 금리는 사실상 마이너스다. 이자 조금 더 준다는 금고.종합금융사 등도 오십보 백보이고, 그렇다고 주식.부동산쪽을 기웃거리기는 불안해 결국 금융기관을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40~50대는 '실패한 경제정책' 으로 인해 이미 상당한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다.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서 50대는 명예퇴직 대상 1순위였고, 요즘은 40대로 내려왔다. 얼마 전 한 보험회사는 1952년생 이상 부장급 수십명을 명퇴시켰다.

금융기관이나 공.민간 기업들은 훨씬 더 젊은 사람도 자른다. 이들에게 다른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그 결과 올 3월 현재 40~49세의 실업자는 22만3천명으로 1년 전보다 무려 1만3천명이 늘었다. 50~59세 실업자도 9천명이나 증가했다. 아예 구직을 포기한 사람까지 감안하면 사태는 훨씬 심각하다. 현재 퇴직금 등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이자생활소득자들은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에게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불어닥친 '저금리' 의 바람은 외환위기에 이은 제2의 충격이며, 이로 인해 또 한 단계 추락하는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물론 퇴직금 한푼 없이 밀려나온 더 어려운 실직자도 많고, 현금 부자들이 높은 이자로 흥청거리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물가 수준이나 경제성장률 등을 감안할 때 최근의 하락 추세는 너무 빠른 감이 있다.

게다가 저금리가 기업.국가경쟁력 강화보다 소비위축→경기침체→기업도산→증시추락이란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이어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어 과연 국가경제 차원에서 문제가 없는지 의문이다.

*** 안정된 노후 위한 배려를

시간이 갈수록 퇴직생활자들의 '말 못하는' 고통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런 상태가 방치되면 개인적 고통의 단계를 넘어 중산층 붕괴, 그리고 사회불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또 가뜩이나 빠른 고령화 및 조기퇴진과 맞물려 우리 사회가 더욱 활력을 잃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 못사는 사회' 가 된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이제는 퇴직생활자를 위한 사회.경제 정책적 배려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퇴직자.노년층이 퇴직금으로 최소한의 생활이나마 안정되게 꾸려나갈 수 있게 하고, 간단한 소일거리라도 찾아줘야 한다.

우선 현 금리수준이 우리 실정에 맞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또 일정 규모 이하의 개인 예금이나 개인연금에 대해서는 세제혜택 등 인센티브를 대폭 확대하고 공적연금 프로그램도 시장원리에 맞게 새로 짜는 등 종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김왕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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