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무국적 아동서 범람에 일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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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내가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학교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지식인들, 그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글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

1970년대 이후 『시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사),『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청년사) 등 묵직한 평론집과 어린이책을 통해 국내 아동문학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이오덕(76)선생이 21세기 첫 어린이날에 때맞춰 현 문단에 대한 쓴소리로 가득한 신간을 펴냈다. '감자꽃' 의 동시작가 고(故) 권태응(1918~51년)의 미발표작들을 함께 수록한 동요 비평집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20여년 전에 내놓은 그의 리얼리즘 아동문학관이 일부에서 '철 지난 목소리' 라는 비판도 받고 있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신간에서 더욱 강화돼 나타나는 그의 문학관은 혹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닐까□ 그건 아니다. 최근 2~3년새 어린이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상당수가 무국적 아동서임을 볼 때 그의 목소리는 '더욱 필요한 죽비' 일는지 모른다. 과연 어떤 현실이 이 노(老)평론가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권태응인가.

먼저 "우리 말의 알맹이는 농민들의 말이고, 우리 문화의 바탕은 자연 속에서 일하면서 살아 온 농민들의 삶 속에 있다" (19쪽)고 믿는 이오덕씨의 눈에 비친 현재의 문단은 한심하다. 도시화에 의해 무너진 농촌의 삶에 이야깃거리가 넘쳐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글감을 찾아 아프리카로, 남미로, 인도로 떠나는 작가들은 그가 볼 때 '얼이 빠져있다' (7쪽).

특히 동요가 생겨나는 중요한 조건을 '삶과 자연' 이라고 보고 '동심천사주의의 짝짜꿍 동요' 나 '감각적 언어기교의 동시' 를 비판해온 그는 아파트 숲에 갇혀 부모들의 교육열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런 그가 발견한 해결책이 권태응이다. "순이가 옥이 집에 놀러 오면/순이가 손님, 노래 손님. //호박씨 한오큼 대접 받고/웃으며 풀어요, 노래 보따리…" 로 시작되는 작품 '노래 손님' 을 해설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호박씨를 까먹고 볶은콩을 먹는 아이들이 지금은 그 어느 마을에도 없다. 모두 오염된 식품만을 먹고, 그 마음도 몸과 함께 병들어 있는 아이들 뿐이라는 생각을 할 때 가슴이 탁 막힌다. 이럴수록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동요를 가르쳐야겠다. " (81쪽)

1부와 2부에 실어놓은 권시인의 작품들을 보면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까맣게 익어진 녹두 타래/파랑새 먹을라 어서 따자. /볕바른 멍석에 널어 놓으면/혼자서 호도독 벌어진다. //타래는 까매도 파랑 녹두. /몸집은 작아도 파랑 녹두. /청포에 부치기 숙주나물/잔치 때 제사 때 소중하지. " ( '녹두' 전문)절로 흥얼흥얼 노래가 된다. 그야말로 삶과 리듬이 함께 살아있는 '진짜 동요' 다. "밥 얻으러 온 사람/가엾은 사람/다 같이 우리 동포/조선사람//등에 업힌 그 아기/몹시 춥겠네//뜨신 국에 밥 한술/먹고 가시오" ( '밥 얻으러 온 사람' 전문) 등에선 가난한 이웃, 그리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또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담은 권시인의 작품을 다룬 3부는 오랫동안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전념해온 이씨의 주장이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6.25 이후 '동무' 란 말이 싹 없어진 것에 대해 '속이 좁고 생각이 바로 되어 있지 않은 권력자들' 을 나무라는가 하면 대다수 지방에서 사용하던 말들이 서울 양반들의 '표준말' 에 의해 밀려난 현상들을 지적한다.

사실 표준말이나 한글교육 등에 대한 이씨의 견해에는 선뜻 수긍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현실비판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걸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이 귀담아 들을 만하다. 아니, 삶이 살아있는 동요들을 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김정수 기자

<권태응 시인은…>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 한때 동요로 널리 불렸던 '감자꽃' 으로 유명한 그는 일제시절 이른바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징역생활을 했다. 이때 얻은 폐결핵으로 고향인 충주에서 요양 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아동문학사상 농촌과 자연 속의 삶을 가장 잘 묘사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오는 5월 6일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충주 탄금대에서 타계 50주기를 추모하는 전국 어린이 시.그림 잔치 등이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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