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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일방적” “부적절” 격앙 … 여권 겨냥한 성명은 사상 처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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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나라당이 대법관 수를 현재 14명에서 24명으로 늘리는 법원제도 개선 방안을 추진키로 해 찬반 양론이 일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이날 오후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재판을 위해 법정에 입장해 앉아 있다. 왼쪽부터 민일영·양창수·안대희·김능환·김지형·양승태 대법관, 이 대법원장, 박시환·이홍훈·전수안·차한성·신영철 대법관. 김영란 대법관은 해외 출장으로 이날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 법원행정처장도 대법관이지만 재판에 참여하지 않는다. [연합뉴스]

18일 오후 2시.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법관 11명과 함께 대법정에 들어섰다. 평소처럼 판결을 선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느 날과 달랐다.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2시간30분 후 박일환 법원행정처장이 대법원 3층 회견장에서 성명서를 읽어내려갔다.

이날 성명 발표는 이례적이고도 전격적이었다. 법원행정처장이 여당을 향해 성명을 발표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또 대법원과 여권의 관계가 ‘해빙’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점에서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이 대법원장은 올 초 ‘편향 판결’ 논란 이후 사법부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일부 판사들의 정치적 편향을 시정해야 한다”는 여권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는 지난달 22일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판사 개인의 독단을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경계했다. 이어 대법원이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등 법원 내 단체에 대한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한나라당 사법 개혁안을 다룬 본지 3월 18일자.

◆이례적으로 격한 용어 구사=박 처장은 이날 성명서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진행방식” “매우 부적절”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심마저 잃은 처사” 등 격한 용어를 사용했다. 대법원이 이번 사태에 대해 얼마나 강경한 입장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임기가 1년6개월가량 남은 이 대법원장이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며 반격에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법원 안팎에서는 “‘더 이상 묵과하기 힘들다’는 상황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국회 사법제도개혁특위가 16일 첫 회의를 연 지 하루 만인 17일 갑자기 법원제도 개선안을 들고 나왔다”며 “사법부를 빼놓은 논의 진행은 삼권분립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사자인 사법부와 상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사법부의 전체 틀을 바꾸는 개선안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얘기다. 또 다른 관계자도 “사법부를 입법부(국회)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라며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실제 상당수 판사들이 한나라당 개선안에 담긴 법관인사위원회·양형위원회 설치 방안에 대해 집단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판사는 “법무부 장관과 대한변협 회장 등이 추천한 외부위원들이 인사권을 가질 경우 판사들도 정치권 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면서 “그 결과 재판의 독립성도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 같은 법원 내부의 의견을 수용해 성명 발표를 재가한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측은 “성명 발표를 주도한 것은 법원행정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법원 구조상 대법원장의 의중이 실리지 않고는 성명 발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충돌을 이 대법원장-현 여권의 껄끄러운 관계와 결부짓는 시각도 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이 대법원장이 ‘우리법연구회’ 출신 판사들을 중용하면서 진보성향 판결이 두드러졌다는 게 여권 내부의 시각이다. 지난해 2월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 논란 당시 이 대법원장이 소장 판사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여권의 인식은 더욱 악화됐다. 같은 해 8월엔 대법관 임명 제청이 계속 미뤄지며 청와대와 대법원 간에 갈등설이 흘러나왔다. ‘편향 판결’ 논란을 계기로 한나라당이 “이 대법원장이 나서서 정리해야 한다”며 대법원장 책임론을 들고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이 대법원장을 둘러싼 역학 관계로 인해 이번 갈등이 쉽게 풀리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법원 관계자는 “현재로선 대법원장이 내놓을 카드가 많지 않다”면서 “권력분립 원칙에 따라 순리로 풀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권석천·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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