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반세기 전의 우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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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제 나는 52년에 걸친 군인 생활을 마치려고 합니다. 내가 육군에 입대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소년 시절의 모든 꿈과 희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 광장에서 선서를 마친 이래 세계에는 수많은 변동이 일어났으며,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렴의 자랑스런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 (『맥아더 회고록』, 일신서적, 1993, 하권, 2백81쪽).

*** '항명' 이유 해임된 맥아더

1951년 4월 20일, 그러니까 반세기 전 오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미국 양원 합동회의에서 이런 연설로 작별을 고했다. 이달 11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 겸 미8군 사령관 맥아더를 전격적으로 해임했었다. 명분은 '항명' 이었다.

전쟁에는 승리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굳게 믿는 군인 맥아더는 중공(中共) 연안 봉쇄, 산업 시설 폭격, '자유중국' 군대의 한반도 투입 및 중국 본토 상륙 등 적극적인 공격을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 트루먼에게 그것은 곧 중국의 확전과 소련 참전으로 이어질 또 하나의 세계 대전이었다.

미국한테 아시아는 결코 유럽의 변방이 아니라는 맥아더의 지론과는 달리, 트루먼 행정부에게 유럽의 전략적 지위는 아시아보다 앞섰고, 아시아에서도 한국보다는 일본 방위가 한결 중요한 과제였다.

이해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미국과 일본은 새 시대 개막을 다짐했지만, 이 자리에 노병 맥아더는 끝내 초대되지 않았다.

이왕의 경력과 명성으로 보아 해임 자체도 억울했지만, 맥아더로서는 그 절차가 한층 더 모욕적이었다. 사전에 어떤 진상 조사나 소명 절차도 없이 라디오 뉴스로 해임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무실의 사환이나 청소부나 하급 직원일지라도 이처럼 예절을 무시한 방법으로 해고되지는 않았을 것" 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생이었고, 트루먼은 20세기 미국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맥아더가 생각하는 해임 사유는 군사적인 실수나 정치적인 견해 대립이 아니었다.

오히려 야당과 짜고 무슨 비열한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대통령이 오해한 듯하다면서, 자신이 공화당을 지지하기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링컨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 이라고 소년답기도하고(!) 군인답기도 하게(?) 해명했다.

위의 '비열한 음모' 주장에는 짚이는 것이 있다. 50년 10월 트루먼은 남태평양의 웨이크 섬으로 맥아더를 부른다.

전시에 일선 사령관을 불러냈으면 무언가 중대한 얘기가 있을 법한데, 맥아더로서는 정말 황당하게도 96분간의 회담을 시시한 '한담' 으로 끝냈다.

아무튼 중간 선거가 2주일 뒤로 다가왔고, 그래서 인천 상륙 작전의 승리와 환호를 유권자의 뇌리에 다시 한번 새겨놓으려는 기막힌 선거 메뉴였다는 것이 당시 정가와 언론의 평가였다.

훈장을 달아주면서 장군의 '정치적 야심' 을 넌지시 떠보는 트루먼에게 맥아더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다면서 "각하에게 대항할 장군이 있다면, 그 이름이 아이젠하워이지 맥아더는 아닙니다" 라고 대꾸했다.

이에 얼른 "아이젠하워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랜트조차 훌륭한 대통령의 귀감이 될 걸세" 라는 것이 트루먼의 반응이었다. 어느 평가 보고서에서 그랜트는 역대 41명의 미국 대통령 가운데 38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 웨이크 섬 회담은 선거용

바로 그 평가에서 트루먼은 7위를 차지했다. 재선 가망이 없어서 스스로 출마를 포기했는데도 말이다. 반면 맥아더는 고별 연설을 고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으나, 그 자랑스런 노래 후렴대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52년 12월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한국 전선을 시찰한 아이젠하워와 국무장관 내정자 존 덜레스는 맥아더에게 "장군을 해임한 것은 트루먼이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이었다" 고 덕담을 보냈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귀하의 계획 이외에 달리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고 송별 메시지를 전했다.

맥아더가 우리 역사에 소정방으로 기록될지, 이여송으로 기록될지 그 사필(史筆)의 향방은 나의 추리를 뛰어넘는다. 다만 강대국의 장군과 대통령이 빚어낸 반세기 전의 '우화' 에 이제 더는 희롱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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