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소극적 안락사' 인정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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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초 S대병원 중환자실에선 환자보호자와 의사 사이에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문병을 온 환자 가족이 갑자기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인공호흡기를 환자에게서 떼어내려고 했기 때문. 존속살인으로 사법처리를 받을 수 있는 이런 행위를 보호자가 행동에 옮기게 된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뇌경색으로 지난 1월부터 의식을 잃은 환자의 치료비로 병원측이 청구한 금액은 1천6백여만원. 이중 1천4백만원이 밀려있었던 것이다.

병원 역시 환자 가족의 딱한 사연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의사들이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환자보호자의 요청을 들어주면 현행법으로 살인죄를 적용받는다는 것을 이미 1998년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비극적 상황이 병원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재연된다는 것이다. 환자 가족으로부터 의사들이 멱살잡이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요, 봉고차로 환자를 실어가려는 가족과 병원팀이 패싸움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일마저 일어난다. 1년 이상 중환자실 병상을 차지하고 있는 의식불명 환자들 때문에 정작 다급한 환자들은 일반병실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는 경우도 흔하다.

미국의 멜빈 코너는 『현대의학의 위기』라는 그의 저서에서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낸시 크루잔의 얘기를 전한다. 그녀는 25세 되던 83년 교통사고로 뇌가 손상됐다. 뇌사는 아니어서 인공호흡기 신세는 면했지만 의식이 없기 때문에 튜브로 음식을 공급받아야 했다.

의료의 도움을 받으면 그녀는 적어도 30년은 더 살 수 있었지만 부모는 딸의 급식튜브를 제거하도록 법에 호소했다. 몇 년 동안 병상을 지켜보며 바깥세상에 반응하지 못하는 식물 인생과 편안한 죽음을 저울질했던 것이다.

하급법원은 부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미주리주 대법원은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워 그들의 청원을 거부했다. 음식과 물의 공급중단은 기아와 갈증으로 사람을 죽게 하는 살인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주 법원의 법률 규정은 완화됐다. 사고 후 8년이란 세월이 지난 91년 그녀에게서 급식튜브가 제거됐다. 그녀의 부모는 강력한 안정제와 진통제를 맞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며 애끊는 비통함과 함께 해방감을 느꼈을 터였다.

주 법원의 결정에는 환자 가족의 고통과 의료경제적인 측면이 함께 고려됐을 것이다. 낸시 크루잔에게 지불된 연 13만달러의 치료비는 한정된 의료자원 때문에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값지게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의료의 기회비용이나 가족의 고통은 생명의 윤리, 또는 존엄이라는 주장 앞에 빛이 바랜다. 인공호흡기든 급식튜브든 인위적인 도구에 의존한 삶의 연장이 과연 존엄할까. 그리고 그러한 생존이 품위있는 죽음보다 가치있는 것일까.

삶과 죽음 사이에는 모호한 경계선이 있다. 발전하는 과학 덕분(?)에 이 경계역은 갈수록 넓어진다. 첨단의료장비와 의술은 우리에게 조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더 많은 의료비를 강요하고, 이별의 고통을 연장시킨다.

과학기술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지구상의 삶을 연장해 가는데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어가는 과정의 환자에게 의료지원을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는 인정돼야 한다. 안락사 논쟁을 보면서 의학은 살아있는 자, 살 수 있는 자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고종관 정보과학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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