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질서 '구조조정'] 2. 중·러 반미연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지난 2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선 중국인이 탄 버스가 전복돼 2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상자는 미국 공연에 나섰던 베이징(北京)무도학원의 연기자들이었다. 중국을 알리려는 풀뿌리 차원의 시도는 결국 비극 속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중국 정부 대표단의 방미 외교를 연상시킨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세차례의 대표단을 보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했다. 첸치천(錢其琛)부총리는 지난달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보다 미국에 미리 도착하고도 모리보다 훨씬 늦게 부시를 만나는 '수모' 까지 당했다.

錢의 방미기간 중 미국 조야(朝野)에서 나온 얘기도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 구축▶인권문제▶대만에 대한 첨단무기판매 문제 등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중국을 '우호국가' 가 아닌 '전략적 경쟁국' 으로 보는 미국측 입장이 확인된 것이다.

지난 1일의 미.중 군용기 충돌사건은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중국은 사건 초기에 미국이 구축함 3척을 하이난다오(海南島)로 파견한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승무원 전원을 석방했지만 돌아온 것은 미국의 대중 제재 모색과 정찰 비행 재개 선언이었다. 이래저래 중국은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목표가 미국의 패권 확립임을 확신하는 분위기다.

클린턴 행정부 때와 딴판인 미국의 새 정책은 중국에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하고 있다. 상대는 역시 중국 만큼이나 미국의 벽에 부닥치고 있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이미 미국과 스파이 추방전을 벌였고, 미국의 체첸 접근에 심기가 불편하다.

무엇보다 핵무기에 의한 '공포의 균형' 을 깨뜨릴지도 모를 미국의 NMD구축 계획 저지는 발등에 불이다. 양국이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서 반미전선 구축에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중 정찰기 충돌사건 이후 중국이 러시아제 TU-154M 정찰기를 구입해 미군에 대한 정찰을 강화키로 한 것은 항미(抗美)군사협력을 상징한다는 분석이다. 양국은 오는 5월에 있을 상하이(上海)5개국(중.러.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정상회담에서 공동전선의 실마리를 찾을 예정이다.

한편으론 단합을 과시하면서 물밑에선 구체적인 협력사항을 저울질할 계획이다. 당초 상하이 5개국 회담은 국경선 획정과 국경주둔 병력감축을 위해 1996년 시작된 것이지만 이번에는 미국에 대한 견제의 장(場)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한 외교 소식통은 "참가국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해 어떤 국가도 대만문제에 개입할 수 없으며 대만을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에 편입해서는 곤란하다는 성명을 내는 한편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에 대한 지지를 발표할 것" 이라고 말했다.

중.러는 이를 바탕으로 올 7월 선린우호조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50년대 말 양국이 갈라선 이래 협력관계의 새 장을 열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탕자쉬안(唐家璇)외교부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조약의 구체적인 협력분야로 '경제와 과학기술.군사기술' 의 세가지를 들었다. 唐부장이 군사기술을 든 것은 양국간에 본격적인 군사협력이 시작됨을 예고하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러시아제 무기도입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지난 2월 중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장완녠(張萬年)부주석이 러시아를 방문, 러시아의 무기판매 담당인 일리야 클레바노프 부총리와 만나 1백50억달러에 달하는 첨단무기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언론들은 여기다 양국의 정보기관이 수집한 미국과 대만 관련정보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올 7월의 선린우호조약은 준(準)동맹을 결성하려는 것이라는 분석마저 나온다.

중.러의 결속은 미국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중.러 국경을 안정시키는 것은 양국 모두에 긴요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경제발전(중국)과 경기회복(러시아)을 내건 양국의 연합전선이 자칫 서방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