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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기자의 오토 살롱] 랜드로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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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브랜드가 가격을 좌우하는 시대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브랜드의 가치도 조금씩 높아지게 마련이다. 자동차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전투기 엔진, 자전거, 농업용 트랙터 등 다양하게 출발해 지금의 명품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브랜드 스토리를 소개한다.

부자들의 승용차 하면 롤스로이스나 벤틀리 같은 영국 명차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부자들이 즐겨 찾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어떤 차일까. 한때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였던 로버가 만든 랜드로버의 ‘레인지로버(사진)’가 정답이다. 영국 귀족들이 사냥터에서 장화에 흙을 묻히지 않기 위해 개발한 레인지로버의 기원은 뜻밖에 농업용 지프였다.

1878년 자전거 회사로 시작했던 로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륜구동 전문인 랜드로버 브랜드를 내놓는다. 버려진 군수공장과 물자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1946년 로버는 버밍엄 근교 솔리헐의 군수공장을 자동차 공장으로 개조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전천후로 누볐던 ‘윌리스 지프’ 같은 차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로버는 농작물을 쉽게 나를 수 있는 농업용 지프를 만들었다.

구동장치는 미국 윌리스 지프의 것을 그대로 썼다. 차체는 전투기 제작에 쓰고 남은 알루미늄을 활용했다. 운전석을 차의 중앙에 놓았다. 운전석이 가운데라 농부가 몰면서 주변 상황을 살피기에 좋았다. 좌측통행을 하는 영국과 달리 우측통행을 하는 나라에도 차를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수출할 수 있었다. 1.6L 가솔린 엔진은 55마력을 냈다. 험한 길을 거뜬히 달리는 데다 고치기 쉽고,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다. 48년 첫 시판한 이 차는 영국 농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1년 만에 로버의 승용차보다 많이 팔렸다.

농부뿐 아니라 영국 귀족들도 생활 스타일에 맞는 전용차가 필요해졌다. 귀족들은 런던 저택 외에 교외에 ‘컨트리 하우스’라는 별장을 갖고 있었다. 넓은 땅에 목장이 있고 작은 시내가 흐르는 대자연 속의 호화주택에 친구나 정치인들을 불러 파티를 열거나 사냥을 즐겼다. 문제는 타고 갈 차였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를 몰고 가기에는 길이 험했다. 물론 미국의 지프를 흉내내 만든 ‘디펜더’라는 차가 있었지만 고급 차에 익숙해진 귀족에게는 달구지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귀족들 사이에 ‘농부들이 편하게 타는 농업용 지프처럼 우리에게 맞는 전용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이에 맞춰 70년 등장한 게 럭셔리 SUV의 원조인 레인지로버다. ‘사막의 롤스로이스’로 불린 이 차는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사륜구동을 원하는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고급스러운 내장, 좋은 승차감, 빠른 스피드는 물론이고, 악천후 오지에서도 탈 수 있었다. 왜건형 차체에 강력한 V8 엔진과 상시 사륜구동을 조합한 레인지로버는 전 세계 부유층이 즐겨 찾는 전천후 SUV로 인기를 모았다. 국내에서도 상당수 대기업 회장들이 이 차를 갖고 있다. 가격은 1억5000만원이 넘는다.

레인지로버가 인기를 끌자 중상류층에서 SUV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맞춰 89년 보급형 레인지로버인 ‘디스커버리’가 등장했다. 가격이 30% 이상 저렴하면서 험한 길에서도 잘 달리고, 가족들이 타기에 부족함이 없어 신흥 부자들의 SUV로 자리 잡았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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