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의 벽' 뚫은 김송자 신임 노동부 차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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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제는 여성문제를 떠나 실업률을 낮추고 새 노사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

김송자(金松子.61)신임 노동부차관(사진)의 첫 마디다. 그는 '여장부' '25만 여성 공무원의 대모' 로 통한다. 1969년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관료사회 속 남성의 벽과 싸워 왔다.

***'性域' 뚫은 鐵의 여인

지난해 4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을 그만둘 때까지 근로여성을 위한 정책마련에 30여년간의 공직생활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金차관은 경북 칠곡에서 포목상의 1남6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총무처 인사국에서 6급 행정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金차관은 성차별을 견디다 못해 70년 노동청 부녀계에 자원했다.

그는 당시 "남존여비 사상을 내 대(代)에서 뿌리뽑는 것을 공직생활의 최종 목표로 정했다" 고 회고한다. 이때부터 외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공단 여성근로자를 위한 여자 산업상담원 제도 도입(72년), 근로청소년회관 건립(81년), 버스 안내양 1일 2교대제 도입(83년), 남녀고용평등법(87년), 직장탁아소 의무화(89년), 근로복지공단 출범(95년)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예산당국이나 국회의원, 심지어 노동부 국.실장이나 장.차관과 충돌을 거듭했다. 예산당국에는 아예 '골치아픈 여자' 로 찍혔다고 한다.

탁아소 건 때는 문제를 제기하는 당시 경제기획원 국장에게 "돈 안 갖다줘서 그러느냐" 고 생떼(□)를 써 결국 손을 들게 만들었다. 근로청소년회관의 경우 예산으로 안되자 청와대를 뚫어 새마을성금을 활용하기도 했다.

80년 과장 승진에서 빠지자 노동청장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라는 노랫말이 든 회전의자를 불러 항의한 적도 있다. 저돌적인 업무추진과 기획력 덕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국장.국방대학원 입교.1급 승진 등 '최초' 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지난해 4월 공직생활을 끝내고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해왔다.

金차관은 99년 MBC-TV의 성공시대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이번에 관료 출신의 첫 여성 차관에 올라 또 하나의 '성역' 을 깨뜨렸다. 올해 초 출간한 자서전 『성공하려면 전략가가 돼라』를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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