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채권단 자율' 원칙 어디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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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완전 자본잠식에 빠진 현대건설을 살리기 위한 정부와 채권단의 조치는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지난 28일 아침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 서울호텔에서 진념 부총리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이기호 경제수석 등이 모여 현대건설 관련 대책회의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만 해도 금방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올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陳부총리를 비롯한 주요 참석자들은 다른 층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남아 있던 정부부처 실무자들은 "채권단이 알아서 할 것" 이라고 발뺌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채권단 관계자들의 대답은 "언제는 우리가 정했느냐" 는 것이었다. 정부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암시였다.

이 와중에 채권단이 "신규자금 지원 부담을 줄이기 위해 법정관리에 넣었다가 출자전환을 할 것" 이라는 이야기가 새나왔다. 하지만 이미 정부로선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회생을 장담할 수 없다며 출자전환 등을 통해 확실하게 살린다는 방안을 확정한 상태였다.

이런 조짐은 채권단 회의일자를 잡을 수 없다던 외환은행이 이날 오후 7시쯤 갑자기 29일 오전 8시 채권단회의를 열겠다고 공개하면서 포착됐다. 그런데 이 무렵 정부는 채권단 회의 통과에 필요한 현대건설 채권액의 75%를 갖고 있는 9개 주요 은행장만을 서울 여의도 63빌딩으로 은밀히 불러 2조9천억원의 출자안을 통보한 상태였다. 금감원에서 회의를 하려다 외부에 노출될까봐 급히 장소를 바꿨다는 것이다.

29일 오전 예정보다 3시간 늦은 11시부터 채권단 회의가 열렸지만 출자안은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다 알려진 탓에 맥빠진 상태로 진행됐다. 일부 제2금융권 관계자들은 "큰 은행들이 다 정하고 다른 금융기관은 들러리냐" 고 볼멘 소리를 냈지만 채권액이 적어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금융계 관계자들은 이번 지원 결정을 두고 "정부가 이런 '치밀함' 으로 현대건설에 대한 출자전환을 좀더 일찍 추진했다면 은행의 부담이 크게 줄었을 것" 이라며 "정부가 개별 기업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고 지적했다.

김원배 기자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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