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먹는 현대건설' 정부도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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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하청업체가 3천2백개에 이르고 해외공사 수주 규모가 58억달러에 이르는 현대건설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정부 방침은 일찌감치 결정됐다. 문제는 현대건설을 지원하되 대외신인도에 영향을 덜 미치고 특혜시비를 줄일 수 있는 묘안을 찾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나온 방안이 정몽헌 회장 등 현대건설의 경영진 전면 교체와 대주주 지분의 완전 감자(減資)다.

대신 현대건설을 확실하게 살린다며 채권단의 출자 규모를 당초 거론되던 1조4천억원에서 2조9천억원으로 늘렸다. 마이너스 자본 9천억원을 채우고도 기존 자본금 2조원 수준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 회사가 당장 굴러가도록 3천9백억원의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했다.

◇ 현대건설이 이 지경에 이른 책임〓가장 큰 책임은 물론 경영을 부실하게 한 정몽헌 회장 등 대주주와 현 경영진에 있다. 이에 대해 대주주 지분의 완전 소각, 경영진 전면 교체라는 징벌이 가해진다. 채권단은 또 대주주와 경영진의 민사상 책임도 묻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책임도 크다. 현대건설이 지난해 10월 1차 부도를 내는 등 유동성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도 현대측에 끌려 찔끔찔끔 지원하다 결국 출자 규모만 늘렸다. 지난해 11월 출자전환 동의서를 받을 때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데 미적거리는 바람에 회사는 더욱 멍들고 은행 돈이 더 많이 들어가게 됐다. 회사채 신속인수 대상 기업도 현대그룹에 집중됐다.

정부는 부실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채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고비마다 지원하도록 해 현대건설의 부실이 계속 덮여 왔다. 진념 경제부총리도 "지난해 1조5천억원의 자구노력을 하면 현대건설의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던 판단은 결론적으로 잘못된 것 같다" 고 말했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수십년 동안 현대건설의 주채권은행을 맡아왔지만 최근까지 완전 자본잠식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결국 대규모의 은행단 공동 출자전환으로 다른 은행에까지 멍에를 지웠다. 외환은행은 지난해 말 작성한 출자전환 계획안에선 6천억원 정도의 출자전환이면 현대건설이 독자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지만 석달도 안돼 출자 규모가 2조9천억원으로 불어났다.

일각에선 1999년 말까지만 해도 자기자본이 2조3천억원이라던 현대건설이 갑자기 2조9천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완전 자본잠식 상태의 부실 덩어리로 변한 데 대해 회계감사인의 책임도 거론한다. 소액주주나 채권단의 일원인 제2금융권에서 부실하게 회계감사를 한 책임을 물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해 삼일회계법인은 ▶97년에 차입금이 많아 획기적인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고▶그동안 판단하기 어려웠던 이라크 해외공사 미수금 등을 이번에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정몽헌 회장, 순순히 물러날까〓정부는 특혜시비를 잠재우기 위해 "기업은 살리되 부실기업주에 대해선 철저히 책임을 묻겠다" 고 강조했다. 이런 취지에서 정몽헌 회장의 지분을 완전히 없애고 기존 경영진을 물갈이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鄭회장측은 이번 감사결과가 손실 규모를 지나치게 부풀렸다며 경영권에 미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鄭회장과 현 경영진이 출자전환을 위한 임시주총 소집을 미루면서 채권단에 최소한의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 진념 부총리는 "鄭회장이 경영권을 고집한다면 법정관리로 갈 수밖에 없다" 고 압박했다. 채권단도 법정관리까지 갈 경우에는 鄭회장에게 형사책임까지 물을 수 있다고 밝혔다. 鄭회장이 결국 물러날 것으로 보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채권단의 출자전환이 계획보다 늦어져 경영정상화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소액주주의 피해는〓대주주 지분은 완전히 없어지지만 소액주주도 부분 감자가 불가피하다. 채권단은 현대건설이 자본이 완전 잠식된 만큼 원칙적으론 소액주주도 전액 감자해야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정 수준의 감자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감자비율은 채권단 운영위원회에서 곧 결정할 방침이다.

이에 대해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소액주주의 경우 액면가 5천원에 맞추는 수준의 주식 병합이 있을 것" 이라고 밝혀 현 주가 수준(29일 종가 1천80원)으로는 5대1 정도의 감자가 이뤄질 것임을 내비쳤다.

김원배.최현철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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