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3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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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39. 잇단 감량 경영

내실에 치중한 결과 외환은행의 간판 점포라고 할 수 있는 명동지점의 경우 1백20여명이던 직원이 5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큰 건물의 4개 층을 차지하고 있던 점포도 한 층으로 줄였다. 평당 5백만원이던 전세금을 회수했더니 2백억원이나 됐다. 점포 유지비도 50억원 가량 절감됐다. 절감된 점포 유지비 50억원만 해도 당시 외환은행 전직원 급여의 10%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숙직을 없앤 것도 감량 경영의 일환이었다. 본점과 전 지점에는 매일 두명씩 직원들이 교대로 숙직을 하는 숙직실이 있었다. 땅값으로 따지면 평당 최고 1천만원짜리 숙직실이었다. 도둑이 들어도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지 않는 한 은행 금고는 안전했고, 나머지 비품이라야 타자기.전화기.계산기 등이 고작이던 시절이었다. 컴퓨터도 없을 때였다.

오히려 흉기를 든 괴한을 상대하다 숙직자가 다치거나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숙직을 하느니 차라리 셰퍼드를 풀어놓고 문을 걸어잠그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점포당 20~30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숙직을 한다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말이 숙직이지 타성에 젖어 숙직의 의미도 퇴색해 있었다. 비번인 사람들까지 술 마시고 들어와 자고 가는 곳이 되다 보니 담뱃불로 인한 화재 우려마저 있었다.

당시 국내엔 일본의 경비회사 세컴이 합작 형태로 들어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융기관 중에는 세컴을 이용하는 곳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외환은행은 금융기관의 무인경비 시대를 열게 됐다. 숙직을 없애니 직원들이 다들 좋아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점포 밖에 내놓은 것은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앞장서 ATM을 보급했지만 기계 안에 현금이 들어 있다 보니 오후 5시만 되면 점포 안에 들여놓았다.

크레디트 카드가 현금 카드처럼 쓰이면서 폐점시간대의 이용률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처음엔 가동 시간을 오후 7시까지 연장하고 일부 점포에서만 시범적으로 밖에 내놓았다. 이후 전 점포로 확대했다.

외환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만 해도 비자카드는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발급됐었다. 나는 누구나 국내외에서 비자카드를 쓸 수 있도록 외환관리 규정을 고쳐달라고 재무부에 건의했다. 결국 아무나 비자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조치가 비자 카드 회원 확보에 큰 도움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비 절감책으로 지점장과 본점 부장급 간부들에게 자가운전을 권유하기도 했다. 나는 은행에서 제공한 차들을 감가상각해 중고차 시세보다 20~30% 싸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휘발유값을 지원해 줬다.

외환은행의 부장급 간부들은 해외 근무 경험이 있어 운전 경력이 10여년씩 됐다. 다른 회사들과 달리 자가운전을 하더라도 운전면허증를 새로 따야 하는 문제가 없었다. 자가운전제 도입에 따른 인건비.차량유지비 등 비용 절감액은 대당 8백만원에 달했다. 그러나 이 역시 강제로 실시하지는 않았다. 은행에 자가운전을 도입한 것도 외환은행이 처음이었다.

이런 시도들이 먹혀든 것은 외환은행 직원들의 협조 덕이었다. 외환은행 사람들 중엔 한국은행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시중은행 출신들보다 관료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반면에 사고방식이 합리적이었다.

나는 또 대기업 위주에서 중소기업 위주로 고객이 바뀔 것으로 보고 지점별로 한곳 이상씩 유망 중소기업을 발굴해 지점장 책임하에 지원하도록 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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