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사람들 '마음의 벽' 허물 날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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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등 역사적 전망을 상실한 1990년대의 개인, 억압받는 여성을 그린 전작들로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소설가 공지영(41.사진)씨가 연작 소설집 '별들의 들판'(창비)을 펴냈다. 99년 소설집 '존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후 5년 만이다.

공씨는 26일 작품을 쓰지 않았던 지난 몇 년에 대해 "남편을 따라 독일 베를린에서 1년간 체류했고, 아이 돌보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살림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업에 매여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에는 글감으로가 아닌 '100%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글쓰기를 멀리한 결과 나중에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할 것 같아 무서웠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고 나자 우박과 폭풍우가 시시때때로 몰아쳐 음산하고 무뚝뚝하기만 했던 도시 베를린이 내내 자신을 따라다녔고, 결국 베를린 경험을 소설로 쓰게 됐다"고 밝혔다.

공씨는 "한마디로 베를린에는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사회가 형성돼 있었다"고 말했다.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과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한국에서보다 더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고, 성당에 경상도 출신 신부가 부임하면 전라도 출신 신자들이 등돌릴 정도였다는 것이다. 또 교민들의 사고방식은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주 시기별로 고착돼 연령.계층별로 마치 무지개 칵테일처럼 서로 섞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이든 사람 중에는 아직도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만 비싼 집값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구성원도 다양해 옌볜출신 불법 체류자와 낙오한 유학생, 망명자가 있는가 하면 한국 생각만 하면 아직도 설움이 복받치는 파독(派獨) 간호사.광부 출신들에 상사 주재원들이 뒤섞여 있다고 했다.

연작소설집 '별들의 들판'은 공씨의 그런 베를린 인상과 현지 교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기막힌 사연들을 소설화한 것이다. 소설집에 실린 6편의 중.단편은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것이다.

표제작인 중편 '별들의 들판'의 주인공 수연은 아버지와 사랑을 동시에 잃고 다니던 출판사마저 그만 둔 뒤 막연한 기대를 품고 베를린을 방문한다. 이혼한 어머니와 쌍둥이 동생 나연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동생 나연은 외모만 같을 뿐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다. 수연은 아버지.어머니와 같은 광부.간호사 출신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노부부로부터 어머니와 자신이 헤어지던 마지막 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기억 속에 말라버렸던 눈물, 통곡의 신음소리를 회복한다. 까맣게 모르고 있던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바라보게 된 것이다.

공씨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일곱살짜리 딸에게 이번 소설집을 보여줬더니 '따뜻해졌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편"이라고 기자가 지적하자 그는 "나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인 사람이다.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대부분 상처 받은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글=신준봉,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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