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외교적 실수의 代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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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사일 잡는 미사일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애지중지하는 꿈의 방공망(防空網)이다. 대량 살상무기를 싣고 미국 본토를 향해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공중에서 산산조각 내버리는 공상과학 소설 같은 첨단병기다.

본토방위 미사일(NMD)에 일차적인 장애물이 1972년 미.소간에 맺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두나라는 미사일 잡는 미사일 기지를 한군데 밖에 둘 수 없고 미사일의 숫자도 1백개를 넘을 수 없다. 한마디로 NMD와 ABM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이런 예비지식을 갖고 2월 말 한.러 정상회담에서 나온 공동성명의 제5항을 다시 보자.

"한국과 러시아는 72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핵무기 감축 및 비확산에 대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기반이라는데 동의했다. 두나라는 이 협정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가운데 제2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2)과 제3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3)의 조속한 체결을 희망했다. "

부시에게는 죽어 없어져야 마땅한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는 "전략적 안정의 초석" 이고, 그래서 수정.폐기가 아니라 오히려 보존.강화해야 할 협정이 된 것이다. 이건 도무지 한.미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나올 수 있는 공동성명이 아니다.

이런 공동성명 초안이 외교통상부의 장관을 거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무사 통과해 대통령에게 올라간 것을 보면 이런 외교도 있나 싶다. 외교팀은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을 보존.강화한다는 표현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문안' 으로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우긴다. 그렇다면 왜 金대통령이 나라 체면, 대통령 체면을 버리고 몇번이나 유감표명을 했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공동성명을 뉴욕 타임스가 트집을 잡아서 문제가 됐다는 주장이다. 제5항을 보고도 그것이 미국 본토방위 미사일에 관한 미국.러시아의 힘겨루기에서 러시아 편들기라는 데 주목하지 못하는 기자는 평균적인 문제의식도 갖추지 못한 기자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그것을 푸틴의 외교적 승리라고 논평한 것도 정확하다.

외교팀은 미국도 한국이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을 보존.강화하는 데 동의한 것이 본토방위 미사일에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밖에 더 있는가. 대통령이 나서서 유감표명을 했으니 미국으로서도 한국의 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뒷일을 위해서 최선일 것이다.

본토방위 미사일의 명분상의 표적의 하나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다. 한국이 미국의 본토방위 미사일 계획을 지지한다면 그것은 남북한 화해.협력의 노선과 충돌한다. 한국은 중국.러시아와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북관계의 진전에 지원도 받아야 한다.

이런 사정을 아는 미국은 본토방위 미사일에 반대하는 남북한의 '민족적 공모' 를 의심할 수도 있다. 문제의 공동성명 제5항은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캐나다도 그런 표현을 썼고 지난해 선진8개국(G8)정상회담도 같은 표현을 썼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설명은 한.미관계가 미국.캐나다관계와 같을 수 없고, G8 정상회담은 클린턴시절에 열렸다는 중요한 차이를 무시한 단세포적인 논리다.

한국은 외교적으로 비싼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의 존속을 지지했다가 며칠만에 철회하고 사과한 결과 앞으로 미국의 본토방위 미사일에 관한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힌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약점을 잡고, 러시아는 한국에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부시가 구상하는 요격미사일망이 실현되면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미사일 경쟁의 바람을 촉발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요격미사일 계획은 한국의 장기적인 한반도 평화구상에 위배된다. 그러나 한.미관계의 현실은 NMD에 대한 정면반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모호한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

외교에서 무사안일과 기계적 사고가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깊이 반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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