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소사전 펴낸 용인외고 라틴어 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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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제대로 알려면 라틴어를 공부하는 게 좋아요.” 라틴어는 보통 유적 속에나 존재하는 사어(死語)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양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살아 숨쉬는 언어다. 사전 하나 변변치 않은 환경 탓에 라틴어를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용인외고 라틴어 연구 동아리에서 라틴어·영어·한국어 소사전을 발간했다. 대입 준비에도 바쁠 학생들이 어떻게 도전하게 됐을까.


“한글을 제대로 알려면 훈민정음을 통해 한글이 어떤 이치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라틴어도 서양 언어를 공부하는데 필수죠. 라틴어 공부에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사전을 만들었어요.”

지난달 25일 전국 교보문고의 신간서적 코너에 라틴어로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라는 제목이 붙은 작은 책이 등장했다. 용인외고 라틴어 연구회 ‘MODUS SAPIENTIS(생각하는 방식)’에서 발간한 라틴어·영어·한국어 소사전이었다. 지난해 2월 시작, 1년 만에 빛을 본 이 사전은 라틴어를 영어와 한국어로 동시에 번역한 국내 최초의 사전이다. 이전까지 라틴어를 영어로 번역하거나 라틴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사전은 있었지만 이를 동시에 한 권으로 묶은 책은 없었다.

라틴어 연구회 윤준호(3년)군은 “처음에는 라틴어가 뭔지도 잘 몰랐다”며 “서양어의 뿌리라는 것을 알고는 매력을 느껴 소사전 발간에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윤군은 유럽어인 독일어, 스페인어 등을 공부하다 동사 변화나 단어의 형태·어원이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모두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였기 때문이다. 한서윤(3년)양도 “기원은 다르지만 영어에서도 라틴어의 흔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며 “라틴어와 영어·한국어를 동시에 비교할 수 있는 사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발간 이유를 밝혔다.

이들이 만든 사전은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드의 라틴어 용어를 정리한 것. 1만 1000여 단어가 수록된이 사전은 라틴어 학습의 기본서로 불리는 『아이네이드』를 공부하는 데 최적화 돼있다.

아이네이드는 AP(대학 학점 선이수제) 과목 중 하나로 최근 해외 유학을 염두에 둔 학생들 사이에서 관심이 늘고 있는 라틴어의 주요 교재다. 그러나 기존 사전으로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품사별로 워낙 변화가 심한데다 영어로 해석된 부분을 다시 우리말로 정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신새벽(3년)양은 “당초 계획은 6개월이었는데 중간에 우여곡절이 많이 생겨 이제야 사전이 나오게 됐다”며 “단어장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아마 이 정도만 이해해도 라틴어 실력이 중급 정도는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미국인이 훈민정음 사전 펴낸 것과 같아

5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라틴어 연구회는 지난해 3월 정식으로 동아리 등록을 했다. 그러나 사전 편찬 작업은 그보다 앞선 2월부터 시작됐다. 동아리 등록 전에 이미 라틴어 방과후 수업을 듣는 학생 몇 명이 의기투합한 것. 라틴어 방과후 수업을 지도하는 조경호(스페인어과) 교사의 도움을 받아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1년 새 회원이 17명으로 늘었다. ‘라틴어 첫걸음’이라는 교재를 만든 조 교사는 “그냥 취미 정도로 여기던 라틴어 공부에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에게 사전 편찬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당초 이들은 라틴어 회화책을 만들고 싶었다. 영어처럼 라틴어를 말할 수 있다면 멋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어(古語)에다 상황별로 변화가 워낙 심해 포기하고 대신 사전 편찬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사전 만들기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사전에 실을 단어 추출을 맡았던 몇몇 3학년 회원들이 입시 준비로 시간이 부족해 참여하기 어려웠다. 또 각자 컴퓨터로 작업한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실수로 전체내용을 삭제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라틴어를 응용하면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특히 SAT(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겐 어휘공부에 아주 효과적이죠.” 부록으로 라틴어가 쓰이던 당시의 언어 지도와 역사 속 주요 인물을 정리한 남재윤(3년)군의 주장이다. 한양도 “영문학 전공을 원한다면 라틴어는 필수”라며 “영어의 고급스런 수사법이나 고대어를 배울 때 도움이 크다”고 거들었다. 실제로 소위 SAT의 고급 어휘를 살펴보면 라틴어를 그대로 차용한 단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 아직 법률이나 외교 공식 문서에는 라틴어가 그대로 쓰인 경우가 많다. 오는 5월에 실시되는 라틴어 AP시험에서 “5점 만점에 3점만 맞아도 성공”이라는 허지영(3년)양은 “라틴어를 공부할 때 너무 어려워 많은 좌절을 겪게 되지만 이 책으로 공부하면 분명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라틴어 연구회는 앞으로도 매년 한 권씩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남군과 함께 공동 회장으로 동아리를 이끌고 있는 윤군은 “올해는 라틴어 기초 문법책을 펴낼 생각”이라며 “책을 내는 과정 자체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설명]최근 라틴어·영어·한국어 소사전을 발간해 화제를 모은 용인외고 라틴어 연구회원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정재군, 허지영·신새벽양, 남재윤·윤준호군, 한서윤양, 이주원군.

< 김지혁 기자 mytfact@joongang.co.kr / 사진=최명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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