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 자초할 교과부 ‘온리 잉글리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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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서울 도심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세상이다. 삼삼오오 관광 지도를 펼쳐 든 일본 여성들, 지하철 역에서 내려 경복궁을 찾는 미국인 부부, 명동 쇼핑가를 누비는 중국 단체 관광객들…. ‘다이내믹 코리아’를 경험하려는 외국인들이 느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진다. 서울도 홍콩·싱가포르 같은 국제도시가 되지 말라는 법 있는가.

싱가포르국립대(NUS)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신장섭 박사와 몇 해 전 나눈 대화가 문득 떠오른다.

“이형, 1990년대에는 싱가포르 기업들이 홍콩에 있는 로펌을 찾았는데 요즘에는 거꾸로 됐데.” “왜?” “싱가포르 변호사들의 영어 실력이 더 좋아서.” “왜 그렇게 됐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홍콩의 영어 수준이 떨어졌다는구먼. 그래서 국제적 계약이나 소송을 하려면 홍콩 기업이 싱가포르로 온다는 거야.”

외국어의 위력을 절감하게 만든 얘기였다. 인구 450만 명의 싱가포르는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가 모두 공용어다. 리셴룽 총리는 거기에 러시아어까지 구사한다.

하지만 싱가포르와 경쟁하는 홍콩도 만만치 않다. 웬만한 직장인들은 서너 개의 외국어를 구사한다. 광둥어와 푸퉁화(普通話:중국 표준어)는 기본, 영어는 필수, 일본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은 선택이다.

홍콩에서 한류(韓流)가 일던 2004년께 기자는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수강생 중에는 2∼3개 외국어를 하는 무역회사·은행 직원이 수두룩했다. 그들의 외국어 욕심은 끝이 없었다. 신문 광고의 구인·구직란을 보면 외국어 실력이 연봉 크기와 맞물리는 상관관계가 엿보였다. 그 덕분인지 인구 700만 명의 홍콩을 찾은 관광객은 지난해 2990만 명이나 됐다. 한국(781만 명)의 3.8배다. ‘관광 올림픽’이 열린다면 가히 금메달 감이다.

프랑스의 일부 중산층 가정에선 자녀들이 10대 후반쯤 되면 해외로 6개월 넘게 여행을 보낸다고 한다. 낯선 문화를 경험하고 외국어 실전 훈련을 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대학 입학 전에 두세 개의 외국어를 마스터한 젊은이가 많은 이유 중 하나다. 미국은 대입 전형자료로 활용되는 SAT 과목별 시험 20가지 중 12가지가 9개 언어 시험이다. 바깥 세계를 알고 소통해야 몸값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선진국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요즘 대학가와 고교에서 영어가 아닌 ‘기타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술렁이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마련 중인 ‘2014 수능체제 개정안’에서 제2외국어가 빠진다는 방침이 알려지면서다. ‘제2외국어 교육정상화 추진연합’(집행위원장 조항덕 숙명여대 교수)에 속한 53개 학회·협회는 “공교육에서 제2외국어 학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입시 변천사에서 제2외국어는 천덕꾸러기였다. 대학 본고사 과목에서 빠지고 예비고사, 수능에서 선택과목으로 전락했다. 이제는 몇몇 대학만 선택과목의 하나로 요구할 뿐이다. 더욱이 지난해 제2외국어 응시자 10만 명(수능 전체 수험생은 63만 명) 중 5만 명이 아랍어를 택하는 기막힌 현상까지 발생했다. 더 높은 수능 등급을 따기 위해서란다. 결국 외국에 나가 기본회화조차 어려운 초급자들이 양산되는, 기 막힌 저효율 시스템이다.

지난해 3월 서울에 온 중국의 컨설턴트 천민(陳珉) 중즈(中智)인력자원관리자문 부사장은 뼈 아픈 지적을 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현실을 언급하면서다. “중국어가 돼야 현지 직원과 고객을 상대할 것 아니냐.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면 무리수를 두고 반발을 받을 것 아니냐.”

글로벌 시대에 영어를 못하면 모래밭에 올라간 물고기 신세다. 하지만 ‘오직 영어뿐’이라는 정책도 곤란하다. 한국의 대중국 교역은 이미 미·일을 합한 것을 웃돈다. 중국을 빼놓고 21세기 국제질서를 논하기 어려운 시대다. 일본 역시 한국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웃이다. 올 11월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는 아프리카·중남미 국가들을 망라하는 글로벌 리더십을 다짐하고 있다. 더 다양한 외국어를, 더 많은 젊은이가 공부해야 할 세상이다.

사교육을 잡겠다며 제2외국어를 수능 과목에서 뺀다면 그것은 안병만 교과부 장관의 단견이다. 사교육 과열 경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SAT 방식처럼 절대평가 등급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는 게 낫다. 교과부가 ‘글로벌 코리아’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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