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헌재 결정 마지못해 인정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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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이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관련, 처음 입을 열었다. 총리가 대독한 정기국회 시정연설에서 "누구도 그 결론의 법적 효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헌재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 며칠 동안 여권과 친노세력들의 반발 수위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계기로 정부와 열린우리당도 국토균형발전의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쪽으로 지혜를 모아주기를 당부한다.

그러나 시정연설에서 헌재 결정의 '법적 효력'만을 인정했을 뿐 "존중한다"거나 "겸허히 수용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국민적 혼란과 예산 낭비에 대한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사과도 없었다. 물론 현 정권이 국토균형발전이란 정책적 목표와 '지배세력의 교체'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퇴와 명운'을 걸고 밀어붙이던 수도 이전을 못 하게 됐으니 헌재의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국헌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헌재 결정이 나온 지 나흘 후에, 그나마 마지못해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대통령이 깔끔하게 매듭짓지 않으니 혼란이 그치지 않는다. 열린우리당 강경파들이 헌재와 '맞장 토론'을 하자고 덤비고, 충청권 일부 의원들이 헌재를 비난하며 주민들의 반발을 부추기고 있는 형편이다. 헌재가 이번 결정의 근거로 도입한 관습헌법 문제에 대한 논란은 이제 학계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

여당 내에서 "국정운영 기조를 반성하고 재검토해야 한다" "새로운 국민통합의 계기가 되도록 국민에게 사과하고 후속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의 합리적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당장 법리논쟁이나 항의집회 등도 중단해야 한다. 청와대가 반대시위를 못 하도록 앞장서 설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