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3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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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31. 금융실명제 확산

5공 경제비사를 다룬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이장규 저)는 실명제에 관한 1982년의 논의와 결정이 " '금융실명제〓사회정의' 라는 등식을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놓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 "실명제란 본질적으로 세제의 문제이며, 관행의 정착을 통해 실질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갈등을 무릅쓰고서라도 일격에 밀어붙여야 하는 혁명적 명제처럼 인식되게 되었다" 고 적고 있다.

82년 실명제 파동 이후 실명제에 대해 누구도 "정말 안 한다" 는 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다시 추진할 생각을 하는 사람도 내가 알기로는 드물었다.

금융실명제는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후보의 대표적인 선거공약이었지만 6공 때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93년 8월 YS 정부 때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홍재형(洪在馨) 재무장관(현 민주당 의원)이 총대를 메고 실명제를 추진했다. 주무 부처는 재무부였지만 YS의 지시를 받은 이경식(李經植) 부총리가 재무부와 KDI의 실무팀을 지휘해 작업을 했다. 첫 실명제 파동 이후 11년이 지났던 때라 여건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97년 3월 YS 정부 말기 부총리에 취임한 강경식(姜慶植.현 동부그룹 금융보험부문 회장)씨는 실명제 보완 방침을 밝혔다. 82년 1차 실명제 추진의 주역이었고 긴급명령에 의한 실명제 실시에 찬성한 그가 취임 일성으로 실명제에 제동을 건 것은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실명제는 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97년 중기개발기금 근무를 마치고 홍콩에서 귀국한 뒤 들은 얘기다. 한 신문사에서 공인회계사를 시켜 80년대 부실기업 정리에 대한 검증작업을 벌였다고 했다. 그 결과 원칙에서 벗어난 처리는 한건도 없었다고 들었다. 마지막 산업정책심의회 때 정족수가 되는지 미처 확인하지 않고 회의를 진행한 실수 말고는….

당시 정부가 나서 직접 처리한 회사는 78개였지만 80년대 은행들이 정리한 부실기업 수는 근 5백개에 이른다.

정부가 개입한 것은 해당 부실기업에 돈을 꿔준 금융기관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2금융권까지 합하면 채권 금융기관 수는 보통 50여개에 달했다.

나는 채권단측에 서로 충분히 협의해 '이렇게 하면 되겠다' 는 안을 내면 책임은 내가 지겠노라고 했다. 은행들끼리 합의가 이루어지면 고문 변호사에게 법률검토를 맡겼다.

집행은 다시 은행 몫이었다. 은행 사람들은 신이 나서 일했다. 그러다 보니 은행장 입에서 부실기업 정리 참여에 보람을 느낀다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금융 자율화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부실기업 정리 같은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면서 탄탄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은행은 한국은행대로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했다. 은행의 손실을 메워 주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 요즘의 공적자금에 해당하는 특별융자를 연 3%의 저리로 제공한 것이다.

한은 특융엔 일본은행이 제공한 특융 선례가 참작됐다. 야마이치 증권 사건이 터졌을 때 일본의 다나카 대장상은 지휘권을 발동해 일은으로 하여금 특융을 투입토록 했었다.

80년대 부실 정리 당시 부실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부채와 이자를 줄여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결국 새 돈을 집어넣는 길밖엔 없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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