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리셋장치와 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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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전문가들은 요즘 컴퓨터에 빠진 청소년들이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이유 중의 하나로 리셋 기능을 든다. 게임을 할 때에 성적이 나쁘면 리셋장치를 누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 전자수첩 사용 중 문제가 생길 때 리셋장치를 누르면 공장에서 출하됐을 때와 같은 상태가 된다.

일부 청소년들은 현실에도 리셋장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해 겁없이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고, 문제가 있을 경우엔 그것을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중학생들이 자살사이트를 찾고 사후세계를 경험하려 한 것도 그르칠 경우 리셋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리셋장치는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세상에 고정된 것이 없고 항상 변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 즉 공(空)함을 알고 처음이나 끝으로 돌아가 마음을 다지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이 처음 접근할 때는 무척 조심한다.

가령 연애시절에는 상대를 극진히 대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법, 사회적 관습, 윤리 등에 안주하려 한다. 나와 상대는 자동적으로 서로를 위하고 좋아하도록 돼 있다고 안심한다. 차를 타기만 하면 자연히 목표지점에 도착하는 이치와 같다고 생각한다.

*** 처음이나 끝의 입장이 되라

영화평에 의하면 '러브 앤드 섹스' 는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린다고 한다. 여성 잡지사의 기자인 주인공은 연애박사다.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가슴과 저 품으로 옮겨 다닌다. 뒤에 파트너가 된 남자의 수를 계산해 보니 13명이나 된다. 마침내 인연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거기에도 권태가 찾아든다.

그 시점에서 남녀는 "진정으로 영원한, 사랑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육체를 떠나야만 가능한 것인가" 라며 한탄한다. 두 사람은 이별과 방황을 되풀이하고 나서 마침내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저것은 영화다. 상품성을 위해 해피엔딩으로 처리하기는 했지만 영화를 더 길게 촬영하지 않는다고 해서 권태와 방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 행복

미국의 한 대학연구팀이 같은 해에 결혼한 이들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결혼생활 지속 여부에 대해 조사했다고 한다. 결혼하고 나면 상대에 대한 환상은 깨지게 마련인데 그 기간이 2년이 넘느냐, 마느냐에 결혼 지속 여부가 달려 있단다.

2년 안에 크게 실망하면 갈라설 확률이 커진다는 것이다. 꼭 이혼하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나마 만남 바로 뒤에는 방황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국산영화 '클럽 버터플라이' 도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흔들림을 그린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직접 언급하기 어려운 파트너 바꾸기라는 해괴망측한 방법까지 겪으면서 부부 본래의 애정관계를 회복한다는 줄거리다. 왜 저같은 발악적인 행동이 나와야만 하느냐를 생각하면 인간의 변덕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법.관습.윤리.사랑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부모.자식.부부관계에 있다고 해서 멍하니 퍼져 있어도 자동적으로 상대를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부부 또는 부모가 되기 이전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연습을 하고, 새로운 발상으로 세상과 상대를 경이롭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나도 변하고 상대도 변한다. 그 무한변화의 철칙을 리셋장치로 역이용해 초심의 정열을 회복하는 것이다.

처음이 아닌 끝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리셋방법도 있다. 지금 죽어 보는 것이다. 미리 유서를 써놓은 이들을 다룬 텔레비전 특집이 있었다. 그 유서에서는 검소한 장례와 화장을 부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죽음을 심각하게 떠올려 보는 것이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내가 가장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남에게 주려고 하면 된다. 뭔가. 따뜻한 마음이다.

물질이 없다면 손짓으로라도 나타내고, 손도 움직일 수 없다면 눈빛으로라도 표현하면 된다. 공을 절감하고 찰나 찰나 긴장하는 데서 나오는 사랑표현이 인생을 리셋하는 한가지 방법이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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