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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와 실용 조화된 대타협 기대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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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옛 중국의 후한 말을 다룬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유명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이렇게 시작한다. ‘유비·관우·장비는…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한해 한달 한날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해 한달 한날에 죽기를 원한다…’. 18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한나라당은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중진협의체의 논의 과정에서 도원결의와 같은 것을 한 번쯤 상기해 볼 만하다.

세종시의 원안을 고수하는 것은 이미 국민과 약속한 공약을 지키기 위한 신의와 신뢰 문제라고 한다. 반면 세종시의 수정안을 추진하는 것은 세계적 속도와 변화의 시대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는 실용이라고 한다. 우리 국민의 최종 판정 기준은 무엇이 돼야 할까.

첫째, 정치에서의 신의와 신뢰는 중요하다. 그러나 촉·오·위의 삼국을 사실상 통일한 것은 명분과 신뢰와 의리에 강한 유비·관우·장비의 촉나라가 아니라 권모술수에 능한 조조의 위나라였다는 냉혹한 정치 현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현실정치에서는 명분과 신의와 공약이 언제나 만고불변의 진리나 철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링컨 대통령도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고, 노예를 해방해야만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겠으며, 또 일부의 노예만을 해방하고 나머지를 그대로 둬야 연방이 수호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둘째, 실용은 현실적인 실리가 있어 우선 좋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예수는 전지전능하신데도 기독교를 탄압하는 빌라도와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는 기적의 실리를 택하지 않고 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일시적 승리와 실용과 실리보다는 지면서도 이기고 영원히 이기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세종시 수정 쪽은 물론 원안 쪽도 이런 열린 마음과 서로 지면서도 이기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이 건국헌법을 만들면서 국회의원을 인구비례로 뽑느냐, 각 주 동수로 뽑느냐로 분열 위기를 맞았을 때 양원제로 타협했다. 상원은 각 주 2명 동수, 하원은 인구비례로 뽑도록 한 것이다. 또 선거권이 없는 흑인 수를 선거구 인구 계산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로 맞섰다. 결국 흑인을 5분의 3명으로 계산한다는 기묘한 산술로 타협했다. 이것을 미국 사람들은 대타협(Grand Compromise)이라고 부르면서 대화와 타협정치의 전통으로 지키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제 둘 다 지는 네거티브(負) 섬 게임이 아니라 둘 다 이기는 포지티브(正) 섬 게임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뢰와 실용이 조화되는 세종시의 ‘신용안(信用案)’을 중진협의체에서 도출해 내길 바란다.

이청수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상임고문·한국국제홍보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