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원자 세계의 공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이 좋은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한해 동안 힘을 합해 농사를 지은 형제가 추수한 곡식을 똑같이 나누고 잠이 들었다. 동생이 형님네는 식구도 많으니까 하는 생각에 밤중에 일어나 아무도 몰래 형님네로 볏짐을 날랐다.

형도 올해에는 동생도 장가를 가야 할 텐데 생각하며 동생네로 볏짐을 나르다가 가운데서 마주쳐 얼싸안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서로 주는 마음으로 살면 결과적으로 하나도 늘거나 줄어든 것은 없지만 둘 다 무한한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 반대로 서로 빼앗다 보면 마찬가지로 제로섬이지만 둘 다 마음이 편할 수 없다. 그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다.

흥미롭게도 서로 줌으로써 둘 다 이익이 되는 공조의 원리가 원자세계에도 적용된다. 1백50억년 우주 역사의 아주 초기에 해당하는, 우주의 나이가 50만년쯤 되었을 때 우주에는 비로소 수소원자와 헬륨원자가 등장한다.

우주 최초의 원자이니만큼 수소는 한개의 전자를 가진 가장 간단한 원자다. 헬륨은 두개의 전자를 가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간단한 원자가 생기는 순간 1백억년 후에 태양계와 지구가 생기고 생명이 탄생하는 데 사용될 핵심적인 원리가 이미 작용하고 있다.

수소와 헬륨이 생기고 나서 수억년 후 별이 생기고 그 내부의 높은 온도하에서 무거운 원소들이 생길 때까지 수소와 헬륨은 거의 우주의 단 두가지 원자로 존재했다.

그런데 이들 원자가 우주공간에서 서로 만나면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인다. 수소원자(H)가 다른 수소원자와 만나면 둘이 화학결합을 이뤄 수소분자(H2)를 만든다.

그러나 수소가 헬륨원자와 마주치면 서로 모른 체 비켜간다. 헬륨과 헬륨이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헬륨은 혼자가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초기 우주에서 수소분자는 수억년 동안 유일한 분자로 존재한다.

수소와 헬륨의 이러한 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답은 전자의 수에 있다.

두개의 전자를 가진 헬륨은 안정적이다. 그러나 전자가 하나밖에 없는 수소는 대단히 불안정하다. 수소도 전자를 하나 더 얻으면 헬륨처럼 안정적일 수 있다. 수소와 헬륨밖에 없는 초기 우주에서 수소가 전자를 얻을 데라고는 다른 수소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대로가 좋은 헬륨은 절대로 전자를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 어떤 수소원자가 다른 수소원자에서 전자를 빼앗는다고 해보자. 그럼 전자를 빼앗은 수소는 전자가 두개가 돼 헬륨같이 만족한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수소는 단 한개의 전자를 빼앗기고 벌거벗은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1백50억년 전 초기 우주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수소원자 한개가 다른 수소원자에 접근해서 "내 전자를 내놓을 테니 네 전자도 내놓아서 전자 공유제를 만들자" 는 제안을 한다. 상대방도 그렇게 하면 피차 두개의 전자를 가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될 것을 금방 알아채고 동의한다. 이렇게 해서 우주 최초의 분자가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지금도 우주공간에 제일 많은 수소분자다.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랭뮤어는 이러한 1백50억년의 공조관계여기에 공유결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소가 분자를 만드는 비법을 터득한 지 수억년 후 별이 생기고, 수소로부터 탄소.산소.질소 등 무거운 원소들이 생긴다.

이 원자들이 초신성 폭발로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갔다가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은 자기들의 조상 수소가 아득한 옛날 공유결합으로 안정을 찾았던 일을 기억하고 자기들도 공유결합을 통해 메탄.암모니아.물.이산화탄소 등의 분자를 만든다.

그리고 지금도 이 공유결합의 원리가 원자들을 붙잡아 생명체를 이루게 한다.

가끔 우리 몸을 들여다보면서 서로 내주는 공조의 원리가 아니라면 우리 몸의 모든 원자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을 상기하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공조를 통해 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자.

언뜻 보면 공산주의를 연상시키는 전자 공유하기를 통해 남을 살찌우는 것이 내가 살찌는 길이라는,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을 실천하는 수소 분자는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더구나 그런 원리로 우리 몸이 유지된다니.

金熙濬(서울대 교수.분석화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