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경화 어디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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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도쿄(東京) 시내에서는 우익단체들이 '패전 후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자' '일본의 본모습으로 돌아가자' 등의 말이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집회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지 말 것을 주장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1세기 벽두 일본 열도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보수주의 물결의 한 단면이다.

정치권의 우익성향 발언과 움직임이 잇따르고, 왜곡된 내용으로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킨 우파 학자단체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수정본이 다음달 일본 정부의 승인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일본 국민의 보수화 성향도 두드러지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경기침체와 정치권에 대한 실망으로 일본 국민 사이에 민족주의 의식이 강해진 데다 정치권도 위기탈출을 위해 이를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 보수화 실태〓지난해 말 집권 자민당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橋本)파는 3~5년 안에 '군대 보유 및 교전권을 허용하고 일왕을 국가 원수로 한다' 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평화헌법의 조기 개정은 반대 여론 등 걸림돌이 많아 실현 가능성은 작지만 보수파의 속내를 드러내 주목을 끌었다.

자민당 실세인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전 간사장은 지난 10일 "동맹국인 미국이 무력 공격을 받으면 일본도 자위대를 보내 싸우도록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미국 외의 국가와 동맹을 맺을 수 있고, 자위대에 대한 헌법상의 제약도 줄어든다. 지난해 말 항공모함형 호위함 2척을 건조키로 하는 등 군비증강에 주력해온 일본 방위청의 계획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급기야 지난 18일에는 노로타 호세이(野呂田芳成) 중의원 예산위원장이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 이라는 군국주의 시대의 용어로 표현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했다. 방위청장관 재직 때 한국을 방문, 한.일 군사교류 강화를 추진한 인사가 우익의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이같은 발언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1998년 방일 이후 사실상 처음 나왔다. 일본 언론들은 대부분 이를 보도하지 않거나 간단히 사실만 전했고, 노로타는 오히려 "예산위원장이어서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며 당당한 모습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정객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 지사가 지난해 11~12월 반미.반중론을 담아 잇따라 출간한 저서 2권(『아메리카 신앙을 버려라』『승리하는 일본』)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 국민의 보수화 정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시하라는 최근 아사히(朝日)신문의 차기 총리 후보감 여론조사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일부 보수적 일본 언론에는 종종 '일본 젊은이에게 일본의 역사.전통을 새롭게 가르쳐야 한다' 는 글이 실리곤 한다.

◇ 교과서 문제〓우파 학자 그룹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은 지난해 4월 일제의 침략을 동아시아 안정정책,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으로 묘사하거나 일본에 불리한 역사는 삭제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제작해 문부성에 검정을 신청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1차 검정 때 문제가 있는 2백~4백곳을 수정하도록 지시했고, 현재 수정본을 비공개 심사 중이다.

한국.중국측의 반발을 의식해 일부 내용이 고쳐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당부분 왜곡된 채 다음달 통과돼 인쇄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우익들은 이 교과서가 첫 도입되는 2002년 전체 중학교의 10%에서 사용되도록 한다는 목표 아래 선전책자 배포 등 채택운동을 펼치고 있다. 일본 역사학 교수 1백80여명이 교과서 반대서명을 하기도 했지만 우익에 비해 상당히 미약한 형편이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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