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발언대] 자연사박물관 건립 늦추면 안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바야흐로 전세계가 유전자 열병을 앓고 있다. 인간유전자지도가 완성되고 소.쥐.원숭이의 복제가 이뤄진 데 이어 인간 복제도 멀지않아 실현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첨단과학에서 그렇듯이 우리나라는 선진국을 뒤쫓기에 바쁘다. 가뜩이나 적은 국가예산에서 바이오 코리아 사업이나 우주선 발사, 그리고 나노사업 등을 추진하려니 허리가 휠 지경이다.

그렇다고 성공의 기약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로선 벤처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때일수록 선진국들의 틈새를 공략하고, 더 나아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 기반과 하부구조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미 닥쳐온 바이오시대를 맞아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의 하나는 생물자원에 대한 기초다.

현재 한반도에 나는 생물종으로 기록된 것은 약 2만9천종이다. 하지만 이는 실제 서식하고 있는 생물종의 4분의1에 불과하다. 또한 어떤 생물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지도 거의 모른다. 이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막연하다. 이 모두가 생물종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축적된 정보도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야생 생물 2만여종 가운데 1985년부터 불과 10년사이에 4분의3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국가경영자들은 알고 있는가. 한반도의 생물 가운데 일본과 동유럽권에 유출된 것이 2백50만점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한반도 특산종으로 동물만 약 3천여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증거로서 기준표본은 5분의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국에 유출돼 '국제고아' 가 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한반도의 생태계는 이미 듬성듬성한 거미줄처럼 되고 있다. 이 모두가 생물표본들을 소중히 모아 연구하고 멸종을 방지하기 위해 국민교육을 하는 중심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전세계에는 자연에 관한 표본이 약 25억점 정도 보존돼 있는데, 앞으로 50년 내에 그 다섯 배인 1백30억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죽은 생물에서도 DNA를 뽑아 유전공학의 재료로 쓸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미 선진국들은 지구상 생물종의 기준표본 가운데 90%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생물다양성 보존과 개발에 이미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선진국들이 바야흐로 '생물다양성 제국' 을 펴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이러한 표본들은 비단 유전공학과 신물질 개발 뿐 아니라 환경영향평가.생물집단의 변동탐지.외래종 통제 등 자연보전에 필수적인데 대개 자연사박물관이 관리한다. 미국에는 이러한 박물관이 1천1백여개나 있고 다른 선진국과 중진국도 수백개씩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자연사박물관 보유숫자는 국제통계상 제로다.

자연사박물관 최빈국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자연사박물관이 없는 유일한 국가임은 물론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의 운명을 걸고 기초를 다지는 작업에 힘써야 한다. 마치 인간의 질병치료를 위해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듯이 병 들어가는 지구생태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생물다양성지도를 완성해야 한다. 생물다양성지도를 만들려는 계획은 1992년의 생물다양성협약 체결로 이미 개시됐으나 분류학적 정보의 부족으로 효과적인 진행이 어렵게 되자 유엔환경계획(UNEP)은 그 선결과제로 최근에 국제분류학사업(GTI)을 시작했다.

우리도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말고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그간 중단됐던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을 급속히 추진하고 이에 병행해 생물다양성육성법을 만들어 취약한 학술적 기초를 다져야 한다. 기본 중에 기본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선진국 틈새를 바라볼 수 있는가.

李炳勛.전북대 생물과학부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