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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신지역주의] 8. 스코틀랜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푸른색 바탕에 흰 십자가가 사선으로 그려져 있는 성 앤드루 깃발과 체크무늬 옷을 파는 상점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는 에든버러시.

지난해 12월 말 스코틀랜드의 중심도시인 이곳을 찾아갔을 때 중앙역에서 1㎞ 가량 떨어진 홀리루드 거리에는 자치의회 의사당을 짓는 대규모 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장은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통치를 상징하는 영국 왕실의 궁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안내원은 "3년 뒤면 영국의회 의사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첨단공간이 생겨난다" 고 자랑했다.

이날 에든버러성 근처의 스코틀랜드 자치의회에서는 자치정부의 외무책임자를 불러놓고 며칠 전 열린 유럽연합(EU)정상회담에서 EU 확대방안에 합의한 것이 스코틀랜드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질의하고 있었다.

의원들은 "EU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마당에 자치정부가 영국 정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EU와 상대할 수 있는 창구가 없는 것은 말이 안된다" 고 열변을 토했다.

에든버러는 변화의 새 기운으로 가득했다. 남쪽의 구시가지 곳곳에 정부.의회의 부속건물임을 알리는 새 간판이 걸려 있었고 지역신문들은 의사당 건설비 증액문제 등 지역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영국의 변방에 불과했던 이곳이 신생국가의 수도처럼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약 1년반 전. 3백년만에 스코틀랜드에 자치권이 부활돼 자치정부와 의회가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 도시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전체가 새로 태어난 것을 의미했다.

자치의회 설립은 "분권화(devolution)를 통해 국민 모두가 수긍하는 실질적 통합을 이루겠다" 는 집권 노동당의 정책에서 비롯됐다. 노동당은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하자 자치의회 설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주민의 74%가 이에 찬성했다. 이에 따라 외교.국방.재정 등 국가 주권에 관련된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법안을 만들 수 있는 자치권을 갖게 됐다.

"자치의회는 그동안 채권자가 기한 내에 부채를 갚지 못하는 채무자의 재산을 재판없이 처분하는 이 지역의 오랜 악습을 폐지하는 법을 만드는 등 영국 의회가 관심을 갖지 못했던 부분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습니다. " 지역 일간지 스코츠 맨 정치담당 데이비드 스콧 기자의 평가다.

자치정부는 주민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가을 자치정부의 총리격인 제1장관이 격무에 시달리다 숨지자 장례식 날 에든버러 시가지가 애도의 인파로 가득 찰 정도였다. 여론조사에선 60% 이상이 자치정부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비드 매크론 에든버러대(정치학)교수는 "당장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의회의 활동이 방송으로 중계되고 가까이에서 정치적 행사들이 열리자 주민들이 정치를 '남의 일' 에서 '우리들의 일' 로 받아들여가고 있다" 고 그동안의 변화를 요약했다. '자치정부를 만들어 중앙정부의 권한을 분할하되 국가정체성에 관한 권한은 종전처럼 영국의회가 가진다' 는 것은 지역주의 완화를 위한 '제3의 길' 이었다.

런던대 로버트 해젤(공공정책학)교수는 "79년부터 18년동안 집권한 보수당은 자치권을 조금이라도 부여하면 결국엔 독립을 요구하게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민족당(SNP)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며 "분권화가 사실상 유일한 절충안이었다" 고 말했다.

물론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스키와 북해산 원유만 수출해도 잘 사는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 고 믿는 젊은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선 "독립을 원한다" 고 답하는 비율은 30%를 넘지 않고 있다. 3백년 전 경제적 이득 때문에 스스로 포기했던 주권과 자존심의 일부를 되찾은 주민들이 분권화라는 제3의 길을 일단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뮌헨〓유재식 특파원, 스트라스부르.브르타뉴〓이훈범 특파원, 바르셀로나.빌바오〓예영준 기자, 로마.밀라노〓조강수 기자, 에든버러.브뤼셀〓이상언 기자,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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