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나는 이렇게 읽었다] 10월의 크리스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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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학교의 야간 강의를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다. 광화문에서 내려 쏜살같이 교보문고로 달렸다. 매장 안내자에게 ‘그 책’을 물으니 즉시 한 권을 찾아다 준다. 그날 나는 교보에서 최단기 방문, 최소량 구매라는 두 개의 기록을 세웠다. 책에 찍힌 판매 소인이 2002년 11월 22일이었다. 흔들리는 곳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평소의 신조를 깨고, 강의 뒤 자정 가까운 지하철에서 책을 펴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시울이 화끈하더니 책 위로 무엇이 후드득 쏟아지는 게 아닌가. “내 이 아줌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이런 얘기들이다. 암 말기 환자인 젊은 엄마가 임종을 앞두고 아홉 살과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언제나 씩씩하고, 아빠가 새엄마를 모시고 오면 잘해드리라”고. 엄마를 묻고 온 날 형제는 아빠에게 “우리 항상 씩씩할 게요. 그러니까 제발 새엄마를 데리고 오지 마세요”라고 편지를 쓴다. 오늘 그 대목을 다시 들추니 눈이 부예지더니 컴퓨터 자판의 글씨가 둘로 보인다. 여기서 저자는 “진정 남을 위해 흘리는 이들의 눈물이 자갈밭같이 메마른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27쪽)고 썼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내 생애 단 한번』(샘터, 2002, 227쪽, 7500원)이 바로 그 책이다. 조선일보 독서 칼럼에서 그분의 글을 일종의 ‘직업 의식’으로 읽었으나 점점 빠져들어 이제 직업도 팽개치고(?) 팬이 되기로 했다. 독서를 끝내고 딸아이한테 슬쩍 권했다. 책에 나오는 대로 아버지에 대한 저자의 사모와 존경도 함께 배우라는 꿍심도 섞어서. 그랬더니 “아빠가 그렇게 반한 책이면 나도 한 권 살게”라는 답이 돌아왔다.

핵전쟁이 났는데 동굴에는 여섯밖에 들어갈 수 없다. 수녀·의사·맹인·교사·창녀·가수·정치인·물리학자·농부·본인 가운데서 여섯을 고르도록 학생들에게 그룹 토론을 붙였다.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것이 정치인이고, 만장일치로 뽑힌 것이 본인이었다. 의외로 치열한 토론이 맹인 소년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동정보다 실리가 앞서야 한다는 그룹의 주장이 다수표를 얻으려는 순간, 평소 말을 심하게 더듬는 반대 그룹의 한 학생이 입을 열었다. 전쟁 피해가 가시고 그 여섯이 새 사회를 세울 때 모두 제 일에만 매달리면 다시 경쟁이 생기고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러나 일단 받아들인 이상 어떻게든 이 눈먼 소년을 돌봐야 하므로 거기서 남을 위해 나를 바치는 희생의 가치를 저절로 배울 테니 그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사회라면, 그런 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104쪽).

“무슨 여자가(!) 이렇게 글을 잘 쓰지?” 하루는 사내의 J형에게 농담을 던졌더니 “어깨에 힘을 빼서 그럴 거야”라고 했다. 남을 씹고 조지고 그래서 돌아올 반격까지 재고 따지기 일쑤인 우리네 글과 달리, 그는 힘을 빼고 소리를 낮춰 사랑과 희망과 평화를 즐겨 다룬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체득한 내 삶의 법칙은 슬프게도 ‘삶은 투쟁이고, 투쟁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190쪽)는 토로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소아마비 장애로 목발에 의지하는 장 교수의 대학 시절 꿈의 하나는 흔히 2층이나 3층에 있는 다방에 한번 가보는 것이었다니…. 그래서 말인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12쪽)라는 항의도 혹시 그 슬프고 질긴 투쟁의 연장은 아닐까.

장애 소년들의 500m 육상 경기에서 출발 신호와 함께 여남은 명이 뛰어나갔다. 머지않아 두 소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 경쟁을 벌이던 중 갑자기 하나가 무엇에 걸려 넘어졌다. “그의 경쟁자는 잠깐 주춤하더니 뛰기를 멈추고 돌아서서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그 사이 뒤쫓아오던 선수들이 앞질러 경주는 끝났고, 이들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맨 꼴찌로 들어왔다”(170쪽). 이 외국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은 ‘승리자들’이었다.

길섶에 코스모스가 지천이던 지난 9월 그의 칼럼을 읽고 다소 들뜬 나는 우리 북 리뷰 팀장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정 형, 크리스마스에 멋진 카드를 보내려니 자리 하나 부탁해”했더니 “누구한테요”라며 씨익 웃는다. 그리고 며칠 뒤 장 교수의 고별 칼럼을 통해 투병 소식을 들었다. 그가 따스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처럼 이제 이웃이 따스한 마음으로 그의 쾌유를 빌 차례다. “장미, 괴테, 모차르트, 커피를 사랑하면서” 영어 기도가 우리말 기도보다 3초 빠르기에 ‘주님의 기도’는 영어로, ‘성모송’은 반대여서 우리말로 바치겠다는 그 살가운 미소를 계속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도록! 멋지기는커녕 이 싱겁기 그지없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미리 보내는 뜻도 거기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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