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좌 떠나 본 권력의 풍경’ 들고 하벨이 돌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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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바츨라프 하벨(74). 1989년 공산당에 맞서 ‘벨벳 혁명’을 이끈 체코 민주화의 상징이자 대통령까지 지낸 인물. 그러나 하벨은 정치 입문 전에 이미 동구권 최고의 부조리극 작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정치인 하벨이 아닌, 극작가 하벨은 어떤 모습일까. 20년 만의 하벨 복귀작으로 2008년 초연 당시 유럽 연극계를 뒤흔든 문제작 ‘리빙(Leaving)’이 국내에서도 4월 공연된다. 단지 하벨이 썼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전직 최고 권력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권력 이후의 풍경을 신랄하면서도 쓸쓸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제가 실망시킨 국민, 저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던 국민, 그리고 저를 미워했던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동유럽의 만델라’라 불렸던 하벨의 2003년 대통령 퇴임사는 명연설로 꼽힌다. 연극 ‘리빙’에선 자신의 여성 편력을 연상시키는 듯한 장면까지 보여줘 화제가 됐다. 체코 배우들이 출연하는 4월 국내 공연은 데이비드 라독(체코)이 연출해 2008년 초연과 똑같은 무대를 만든다. [LG아트센터 제공]

공연을 앞둔 하벨과 e-메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괄호 안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다. (1994년 간암 발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간 하벨은 그 후로도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번 겨울 건강이 위험했다. 감옥에서 폐렴을 심하게 앓았다. (하벨은 77년 공산주의 억압에 반대하는 ‘77헌장’ 발표를 주도해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오른쪽 폐의 절반을 제거해 어떤 감염도 심각한 염증으로 전이되기 쉽다. 지금은 괜찮다.

-희곡 작가로, 반체제 인사로, 대통령으로 여러 모습을 살아왔다. 어떤 때가 가장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내 삶엔 다양한 얼굴이 있어 왔지만, 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언제나 강한 신념에 따라 행동해왔다. 물론 정치 수감자, 저항 작가, 대통령으로 사는 것엔 차이가 있다. 각각의 상황에서 내 행동과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사회 문제에 책임감을 느낀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한다면, 감옥에 있든 권력의 최정점에 있든, 결국은 누구나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으로 믿고 있다.”

-본인에게 ‘권력’이란 무엇인가.

“내가 항상 추구한 것은 연극과 문학이었다. 예술적 방법으로 사회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을 피력하곤 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체코의 현실은 모든 사고를 정치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난 저절로 정치의 일부가 됐다. 비판하는 것을 멈추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칠 수 없어 89년 대통령직을 수락했다. 13년 후 대통령직을 떠난 건 기본적으로 나에겐 ‘해방’이었다. 현재도 어쩔 수 없이 외교적 침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완전한 자유를 느끼지 못할 듯싶다.” 

연극 ‘리빙’의 주인공은 60대의 전 총리 빌렘 리에게르다. 그는 권좌에서 내려온 뒤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정치적 동지들은 그를 떠나며, 새 권력은 그를 회유하고 협박한다. 연극은 발표 당시 하벨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평가가 많았다. 유약하고 여성 편력이 심한 인물로 묘사되는 주인공 리에게르는 하벨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고, 극중 그를 축출한 클레인이라는 인물은 하벨의 정치 라이벌이자 현 체코 대통령인 바츨라프 클라우스와 중첩되곤 했다. 평론가들은 자신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들춰낸 하벨의 용기와 정직함을 높이 샀다.

-퇴임 후 첫 작품으로 ‘리빙’을 택한 이유는. (하벨은 본래 89년에 ‘리빙’ 초고를 썼다)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권력을 잃은 ‘리어왕’식 테마에 관심이 많았다. 희곡의 3분의2 가량을 쓴 상태에서 89년 대통령이 됐다. 시간적으로 봐도 연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영감을 얻은 게 아니다. 6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 점령하에 들어가며 상실감에 빠진 과거 정치인들에게서 많은 모티브를 따왔다. 89년 때의 초고와 퇴임 후 다시 쓴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리빙’ 주인공이 하벨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나는 내가 그 캐릭터를 전혀 닮지 않기를 바란다.”

-‘리빙’이 영화화되고 있다. (하벨이 직접 감독까지 한다)

“지난해 여름 영화 대본을 썼다. 올 여름 두 달간 촬영하고, 가을에 후반 작업을 하게 된다. 영화 역시 희곡 텍스트를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한다. 내년 초 개봉 예정이다.”

-향후 계획은

“내게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희곡을 한편 더 쓰고 싶다. 하지만 과연 내 미래를 누가 알겠는가.”

최민우 기자

◆바츨라프 하벨=1936년 체코 프라하의 유명한 사업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르주아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48년 수립된 공산 정권하에서 초등학교 이외엔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못했다. 무대기술자로 연극을 접하던 27세 때 쓴 ‘정원 파티’가 선풍을 일으키며 동유럽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부상했다. 68년 ‘프라하의 봄’과 함께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비공산주의자론 처음으로 89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 취임했고, 93년 독립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연극 ‘리빙’=4월 2∼4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3·5·7만원, 02-200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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