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똥파리, 손글씨 간판 … 추억으로 남은 서울의 속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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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1세기 도시는 추억과 연이어 이별한다. 서울 청진동 피맛골의 마지막 음식점 ‘대림식당’이 지난달 23일 문을 닫았다. 서민과 함께한 600년 역사가 재개발로 막을 내린 게다. 사라져가는 도시의 한 켠에선 뉴타운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하는 작업도 벌어진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왕십리·길음동·돈의문·북아현동 등 4개 지역의 『2009 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를 한꺼번에 출간했다. 뉴타운 예정지의 역사, 환경과 그 속의 삶을 채록해 분석한 보고서다.

도시고고학·도시인류학이 새롭게 뜨고 있다. 속도와 개발의 20세기 도시풍경에 대한 문화적 반성이다. 서울 돈의문 뉴타운지역의 한옥 지붕에 가지런히 놓여진 대추와 호박.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민들이 일군 서울의 고향=재개발 대상이 됐다는 건 그만큼 낙후된, 가난한 동네라는 의미다. 그러나 출발은 동네 별로 달랐다. 돈의문은 조선시대의 흔적부터 백범 김구의 사저인 경교장 등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북아현동은 조선시대 중상류층 거주지였다. 시인 윤동주, 화가 이인성, 일제시대에 최초의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던 송기주 등의 엘리트가 그곳 출신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상경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달동네로 변해갔다.

길음동은 미아리 고개 너머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공동묘지로 쓰였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이농민·수재민·철거민 등이 몰려들어 대표적인 달동네가 됐다.

왕십리는 조선시대 사대문 안으로 들여가는 채소 등이 집결하던 물류의 중심지였다. 씻고 남은 채소 부스러기로 해장국을 끓여 파는 식당도 생겼다. ‘왕십리 똥파리’라는 별명이 붙은 건 1930년대 부설된 기동차(汽動車)에 새까맣게 똥파리가 들러붙은 것에서 비롯됐다. 기동차가 비료로 쓸 인분을 싣고 왕십리를 통과해 뚝섬 채소재배지로 향했던 게다.

“왕십리 토박이 말씀이, 인분 저장소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대요. ‘왕십리 똥파리’가 아니라 ‘용두동 똥파리’여야 하는데 억울하다는 거죠.” (서울역사박물관 김상수 학예연구사)

왕십리 기동차는 60년대에 사라졌고, 70년대에는 임대료 싼 한옥을 개조한 가내공장지대가 조성됐다. 길음동에는 공동묘지를 건드리기가 싫어 산과 암반을 깎아 지은 집들이 독특한 형태의 도시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현동엔 일제시대 토막촌(낮은 지붕이 이어지고 천막을 친 주거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가 주도로 계획해 정비한 도시가 아니라, 되는대로 집 짓고 살았기에 미로처럼 복잡하면서도 거미줄처럼 자연스럽게 골목과 담벼락이 이어졌다.

서민 체취가 담긴 북아현동 골목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살린다=뉴타운이란 결국 이런 지형을 판판하게 깎아 옹벽 치고 고층을 올리는 재개발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지형은 보기 힘들어지는 거죠. 이런 것조차 기록의 대상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요. 연탄 때고 사는 사람들은 앞으로 10년이면 사라질 거고요. 서울은 번쩍번쩍한 도시가 되겠죠.”(권혁희 학예연구사)

비뚤 빼뚤 손 글씨로 쓴 낡은 간판, 아직도 종을 치면서 아침마다 두부를 파는 40년 경력의 두부장수, 수입은 얼마 안 되지만 동네 사람 아침 굶을까 새벽같이 문 여는 길모퉁이 구멍가게…. 모두 재개발이 완료되면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비록 불편하고 낡았다 해도 고향 풍경이 사라지는 건 누구에게나 섭섭한 일이다. 길음동 출신인 탤런트 전원주씨는 그래서 길음동 보고서 동영상의 내레이션을 맡았단다.

박물관에선 기억만 채록하는 게 아니라 유물도 수집하고 있다. 피맛골 ‘청일집’ ‘대림식당’ 등의 세간살이가 박물관으로 넘어왔다. 돈의문에선 나무로 만든 전봇대, 손으로 쓴 옛날 간판, 일제시대 수도관 덮개 등을 찍어둔 상태다. 왕십리는 독특한 도시 구조를 살려 박물관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뉴타운 같은 대단위 개발이 아닌 ‘소단위 맞춤형 재개발’을 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지역만 골라 최소한으로 철거한다는 것이다.

“뉴타운 연구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송두리째 없애기보다 부분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한 것 같아요. 큰 건물을 짓기 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무적으로 하잖아요. 인류학 조사도 의무화 하면 좋겠어요. 북아현동이랑 용강동은 조합에서 돈을 부담해 자기 지역을 조사하게 됐는데, 의미 있는 변화죠.” (오문선 학예연구사)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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