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언로(言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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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선왕조가 5백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틴 데는 비록 사회 상층부에 국한됐지만 '트인 언로(言路)' 가 큰 몫을 했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삼사(三司)가 그 중추였다. 특히 대간(臺諫)이라고 불린 사헌부.사간원의 언관(言官)들은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견제하면서 조선시대 여론정치를 주도했다.

당연히 역풍도 끊이지 않았다. 건국 초기 태조 때만 해도 왕과 대간은 밀월관계였다.

주로 개국공신들이 대간직책을 맡아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태조와 대간들은 왕(王)씨 일족과 고려조 유신(遺臣) 숙청작업에 공동보조를 취했다.

나아가 새 정부 내의 반(反)이성계파를 몰아내는 데도 힘을 합쳤다. 그러나 태조 2년(1393)에 대간들이 세자빈(유씨)과 내시(李萬)의 간통사건을 문제삼자 태조는 "남의 집안 일에 관여한다" 고 성을 내면서 관련 대간들을 유배시켰다.

왕권 손상만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한층 노골적으로 대간들을 견제했다. 그가 언로를 봉쇄하는 데 즐겨 쓴 방법은 ▶대간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이동▶항의성(性) 사표 즉각 수리▶상소문 전달통로 봉쇄▶왕과의 접견기회 박탈 등 다양했다.

태종은 또 '세번 간해도 듣지 않으면 떠난다(三諫不聽則去)' 는 말을 역이용해 대간들을 겁주었다. 자신이 상소를 세 번 무시하면 알아서 떠나라는 협박이었다.

그는 "지금부터 (대간이)사직하고자 하면 제주도는 비록 해외에 있으나 내 땅이니 마땅히 일본이나 요동으로 떠나야 옳다" (태종실록)고까지 말했다.

이성무(李成茂)국사편찬위원장의 저서 『조선의 부정부패 어떻게 막았을까』를 보면 명군(名君) 세종도 집권 전반기에는 대간들을 자주 좌천.파직.하옥시킨 탓에 의금부 옥졸들이 "오늘은 비록 헌사(憲司)에 앉아 있으나 내일은 반드시 하옥되어 나의 통제를 받을 것이다" 고 비아냥거릴 지경이었다 한다.

요즘의 언론은 정부와 별개인 만큼 권력이 직접 인사권을 행사하거나 언로를 막을 길은 없다.

광고탄압이나 언론통폐합도 독재정권 때나 통하던 짓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어도 권력과 언론의 긴장관계만큼은 여전히 팽팽하다.

며칠 전 '시사저널' 이 보도한 '반여(反與)언론대책' 문건도 그래서 눈길을 끈다.

한눈에 보아도 작성자는 상당한 안타까움(?)과 방대한 정보, 나름의 '안목' 까지 갖춘 인물임에 틀림없다. 정말 누구인지 궁금하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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