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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가해지면 사고 순간 자동 녹화 목소리 큰 사람 억지 주장 이젠 안 통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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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 08면

영상기록장치에 녹화된 연속 사고 장면. 사진 1의 오른쪽 2차로에 정차 중이던 승용차가 불법 U턴을 시도하다 사고가 난 모습이 찍혀 있다. 대한상운 제공

#지난해 6월 2일 오후 3시30분 서울 개포동의 한 아파트 앞 편도 2차로 도로.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택시기사 김모(41)씨가 1차로로 진행 중이었다. 그때 바로 옆 2차로에 정차 중이던 아우디 승용차가 갑작스럽게 1차로를 거쳐 중앙선을 넘어 반대 차선으로 불법 U턴을 시도했다. 김씨가 피할 겨를도 없이 승용차의 왼쪽 앞문을 들이받았고 이 충격으로 승용차는 반대편 차로의 가장자리까지 밀려났다(사진). 사고 후 운전자들은 병원으로 이송됐고 현장정리는 보험회사가 맡았다. 승용차를 운전했던 50대 초반의 여성 운전자는 보험사 직원에게 2차로에서 1차로로 차선을 바꾸려 하다가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라며 거짓 진술을 했다. 불법 U턴은 언급하지 않았다.

택시 블랙박스 도입 2개월, 달라진 교통사고 현장

보험회사는 고객의 말을 듣고 택시기사에게도 40%의 과실이 있다며 택시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택시에 영상녹화장치를 장착하는 사업 추진 전이었지만 김씨의 택시회사는 2008년 자비로 회사 택시 전 차량에 영상녹화장치를 장착했다. 사고 당시 상황을 녹화한 영상은 여성 운전자의 진술이 거짓이란 걸 쉽게 밝혀줬다. 결국 1심 재판에서 사고 영상이 증거물로 제출됐고 100% 승용차 과실로 인정됐다.

택시 앞 유리에 달린 차량용 블랙박스(영상기록장치). 서울시 모든 택시는 연말까지 이 장치를 달아야한다. 신인섭 기자

#택시기사 김모(62)씨는 지난해 12월 27일 오전 4시30분 서울 관악구의 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안양에서 서울로 가는 여자 승객을 태우고 커브가 많은 고갯길을 넘는 중이었다. 약 시속 60㎞로 편도 2차로 도로에서 1차로를 달리던 김씨는 왼쪽으로 굽은 커브 길에 접어드는 순간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는 승용차를 발견했다. 급히 속도를 줄였지만 중앙선을 넘어온 프라이드 승용차와 택시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사고로 승용차를 운전하던 40대 남성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택시기사 김씨와 승객은 큰 부상을 입었다. 사고 후 현장조사를 하던 경찰은 택시 앞유리에 있던 영상기록장치의 메모리카드에서 사고 때의 영상을 확인했다. 메모리카드에는 프라이드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온 상황이 선명하게 기록돼 있었다. 보통 사망자가 발생한 교통사고는 목격자가 없으면 시비를 가르기 힘들어 법정 분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사고 후 정황만 보고 사건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는 새벽이라 목격자가 없었다. 하지만 영상이 있어 초기 수사만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는 택시 7만2200대는 연말까지 앞유리에 ‘블랙박스(영상기록장치)’를 달아야 한다. 이 장치는 사고 순간의 영상을 담는 카메라와 기억장치다. 지난해 12월부터 의무적으로 달기 시작한 이래 서울시 법인택시 2만2700여 대 모두 블랙박스를 달았다. 개인택시는 4만9500여 대 중 2월 말 현재 1만3000여 대가 장착했다. 나머지 택시도 올해 안에 모두 설치할 예정이다. 장비 값은 설치비를 포함해 대당 13만7000원인데 서울시에서 50%(6만8500원)를 보조해 주고 나머지는 택시회사나 개인이 부담한다. 서울시는 택시 블랙박스를 다는 데 49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시 오세광 택시정책팀장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기 힘든 사고의 책임을 명확히 판별할 수 있고 안전운전을 유도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말했다. 택시에 설치되는 모든 영상기록장치는 전방만 촬영한다. 승객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택시 내부를 녹화하거나 음성을 녹음하지 않는다. 택시기사 명노수(53)씨는 “감시 당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사고 후 시비를 가릴 때 이거 하나면 되더라”고 말했다.

택시에 영상기록장치를 장착하는 사업은 지난해 인천시와 경기도에서 시작해 설치를 의무화하는 시·도가 늘고 있다. 택시업체 대한상운의 이최영 상무는 “영상기록장치를 설치하면 시간별 위치나 속도 등 운행의 모든 상황이 기록돼 기사들이 안전운전과 준법운전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상기록장치는 영상을 녹화하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타입으로 나뉜다.
이벤트 녹화 방식은 급가속·감속이나 접촉사고로 차에 충격이 가해진 시점을 기준으로 10초 전과 20초 후의 영상을 녹화한다(모델에 따라 녹화 길이가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벤트 방식의 녹화 원리는 촬영한 영상을 가상 메모리에 임시로 저장하다 충격이 가해지면 정해진 시간의 영상을 메모리카드에 저장한다.

상시녹화 방식은 전원이 들어오는 동안은 계속 녹화된다. 일반적으로 4G 메모리는 약 6시간을 저장할 수 있다. 5분 단위로 끊어서 저장하는데 메모리 분량이 가득 차면 가장 먼저 녹화한 5분 분량의 파일을 지우고 최근 데이터를 저장한다.

현재 대부분의 영상기록장치는 두 가지 기능을 다 갖추고 있다. 운전자는 이 중 한 가지를 택해 사용한다. 시중에는 카메라 하나짜리 모델에서 4개짜리 모델(앞·뒤·양 옆)까지 나와 있고 화각은 120~140도 정도다. 가격은 5만원에서 120만원까지 다양하다. 전원은 시거잭에 연결하는 방법과 운전석 왼쪽에 있는 퓨즈박스에 직접 연결하는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영상장비 생산회사 (주)제이콤의 이준성 과장은“전원을 퓨즈에 직접 연결하면 장기주차나 긴 여행을 할 때 방전의 위험이 있다. 배터리를 꼭 체크하고 방전 방지 장치를 장착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또 “녹화 도중 메모리를 뽑으면 데이터에 오류가 생길 수 있어 사고가 나면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 아예 전원 자체를 분리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덧붙였다.

영상기록장치를 다는 일반 운전자들도 생기고 있다. 네이버 카페 ‘블랙박스 동호회’의 황성수(40) 매니저는 “2008년부터 카페를 운영했는데 지난해부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영상을 메모리카드에 녹화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기술은 아니지만 자동차에 장착하려면 강한 더위와 추위에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황씨는 “현재는 250여 개 제조사가 제품을 판매 중인데 그중에는 부실업체도 많기 때문에 잘 알아보고 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현대·LIG·동부 등 주요 보험사들도 지난해 후반부터 영상기록장치를 장착한 차량에 대해 보험료를 3% 할인해 주고 있다. 하이카 다이렉트의 안병화 과장은 “보험사 입장에서도 사고 조사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고객들의 안전운전을 유도할 수 있어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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