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성에 무너진 일본의 세계 최강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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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 39면

요즘 국제 뉴스를 접하다 보면 중국의 부상만큼이나 쇼킹한 것이 일본의 ‘침몰’이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1980년대는 일본의 부상과 미국의 몰락이 최대 화두였다. 일본의 17세기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썼다는 『오륜서』가 일본식 전략 마인드를 가장 잘 대표하는 고전으로 평가받아 미국 경영대학원의 필독서가 됐다. GM·포드 등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앞다퉈 ‘도요타 생산방식’을 채택했다. 반면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과 같은 책들은 70년대 중반부터 심각한 쌍둥이 적자에 빠진 미국이 곧 일본에 세계 최강의 자리를 내놓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감히 따라갈 엄두를 낼 수도 없을 정도로 앞서 나가던 선진국이었다.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은 오히려 한국 경제가 자라면 자랄수록 심화돼 갔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대일 무역적자가 그 지표였다. 기술력이나 브랜드 인지도나 한국은 일본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을 것으로 모두들 인식했다. 그러기에 90년대 들어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장기적인 침체기가 도래했지만 일본 경제가 되살아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컨대 일본 경제가 요즘 겪고 있는 시련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셈이다. 일본의 ‘국적기’인 일본항공(JAL)이 파산 신청을 하고, 일본 전자업계의 대명사 소니가 삼성전자에 압도당하고, 일본식 생산체제의 정점을 상징하던 도요타자동차가 리콜 사태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한다.

그렇다면 20세기를 풍미한 일본의 ‘기적 경제’는 왜 21세기 들어 맥을 못 추는 것일까? 많은 분석가는 ‘폐쇄성’을 일본 경제 침몰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든다.

일본인들은 그동안 스스로의 최대 성공 요인을 일본식 수월성(秀越性)에서 찾을 수 있다고 자부해 왔다. 80년대 유행한 ‘니혼진론’은 일본이 일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일본 특유의 문화, 특히 근면·성실로 대변되는 일본 민족 고유의 우수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일본이 성공한 이유는 외국과의 교류나 국제사회의 영향보다 자국민과 자국 고유 문화의 우수성 덕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역사를 살펴보면 국운 융성 시기는 오히려 ‘쇄국’을 포기하고 ‘개국’을 선택한 직후였다. 메이지유신은 대표적인 사례다. 수백 년간 이어 온 봉건 막부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도입하는 한편 서구 문명을 과감하게 수입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면서 일본은 순식간에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20년대 중반 개국의 시대는 끝난다. 일본은 자국 황실과 인종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폐쇄성은 결국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바람에 이웃 국가들까지 불행한 역사를 겪어야 했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포기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다시 한번 미국의 강제에 의해 개국을 단행하면서다. 메이지유신이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함’으로 촉발됐다면, 두 번째 개국은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주리호에 의해 시작됐다. 미국은 5년에 걸친 군정을 통해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해 나갔다. 그 결과 일본은 50년대 들어 소위 ‘요시다 독트린’을 채택하면서 평화주의와 경제 제일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대 일본의 전후(戰後) 체제가 절정에 이르면서 일본 사회는 점차 폐쇄적으로 변질돼 갔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과감하게 채택해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일본 고유의 특성과 우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 경제의 침몰이 보여 주는 교훈은 폐쇄성의 무서움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미국을 추월하고 전 세계 시장을 제패할 듯 무서운 기세로 질주하던 일본 경제가 하루아침에 추락하게 된 것은 ‘우리 식대로’를 고집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한국 경제는 다행히(?) 일본 경제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기 때문인지 감히 일본과 같은 폐쇄성을 고집할 여지조차 없다. 또 경제 규모가 작아 외부로부터 밀어닥치는 풍파에 쉽게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배우고 변하고 적응하는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고달프지만 한국 경제의 엄연한 생존 조건이다. 일본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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