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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속에 꿈 찾는 소년 그린 '빌리 엘리어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발레화를 목에 걸고 풀쩍 뛰는 빌리의 해맑은 얼굴에서 사회적 인습은 결코 인간의 의지를 꺾지는 못하는 허깨비란 걸 깨닫는다. 권투 글로브를 꼈지만 자꾸 발레봉을 잡은 여자 아이들에게 시선이 끌리는 소년 빌리 엘리어트. 그가 신나는 펑크록 리듬에 맞춰 난공불락의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낼 때 영화는 더 이상 그들만의 삶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돼 가슴을 펄떡거리게 한다.

지난해 영국 영화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으로 꼽히는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17일 개봉)는 올해 미국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상을 놓고 '글래디에이터' 와 경합을 벌였고 다음달 열릴 아카데미상 후보로 언급될 만큼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다.

하층민 출신으로 발레학교 오디션에 참가해 매끈한 춤 솜씨로 감동을 준 제니퍼 빌즈의 '플래시 댄스' (83년)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마크 허먼 감독의 '브래스트 오프' (96년)나 피터 캐서네오 감독의 '풀 몬티' (97년)처럼, 화려한 치장보다는 정통 드라마에 힘을 줘 인간미를 물씬 풍기게 하는 작품이다.

1984년 영국 북부의 탄광촌 빌링엄엔 대처 정부의 광산개혁 조치가 취해지고 이에 반발하는 광부들의 파업이 한창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가부장적 광부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치매 증세를 보이는 할머니와 살고 있는 빌리(제이미 벨). 아들이 씩씩한 남자로 성장하길 원하는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는 빌리를 권투 도장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체육관 한 모퉁이에서 하는 발레수업에 우연히 참여하게 된 빌리는 순식간에 발레에 매료되고 만다.

행복도 잠시, 거친 노동자인 아버지와 형에게 발레는 게이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놀이에 불과했고, 발레를 하는 아들은 곧 집안의 수치였다.

그래도 발레를 멈추지 않는 빌리와 그의 천재성을 발견한 발레 교사 윌킨슨(줄리 월터스).

어느날 친구에게 자신의 발레 솜씨를 선보이는 빌리를 훔쳐본 아버지는 아들의 열정에 가부장적 자존심을 접는다.

2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된 빌리역의 제이미 벨(13)은 6세때부터 무용을 시작했으며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발레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는 몸짓에서부터 익살맞은 표정까지 완벽히 소화했고 덕분에 영화제에서 상도 꽤 받은 제이미는 새로 걱정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영화 속 빌리처럼 모든 반 친구들에게 자신이 무용을 한다는 사실을 완벽히 숨겨왔기 때문이다.

빌리의 성공을 더욱 감동적으로 만든 것은 아버지 재키다. 피폐한 광산촌에서 아내가 남긴 피아노를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부수며 눈물 짓던 그가 평생 믿어온 남성성의 신화를 접고 아내의 패물까지 내다 팔아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모습이란…. 빌리가 왕립발레스쿨의 오디션을 받을 때 아들보다 더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표정에는 이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영화 속에서 정작 빌리가 추는 춤은 우아한 발레가 아닌 영국식 탭댄스와 발레가 혼합된 리버댄스다. 춤의 배경이 된 음악 역시 '격조 있는' 클래식이 아니라 체제 전복적인 브리티시 펑크록이다.

연극 연출가로 이 영화가 데뷔작인 스티븐 댈드리 감독의 화법은 때론 상당한 긴장감을 주면서도 순박하고 자연스럽다.

'아메리칸 뷰티' 의 샘 멘데스 감독에 이어 영국 영화계에는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감독이 한 사람 더 탄생했다.

신용호 기자

: 아버지와 아들이 싸운다. 처음에야 아버지를 이길 아들이 어디있는가.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고집을 결국 꺾지 못한다. 세상 이치가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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