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커비전] '히딩크 축구' 시간을 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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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설 명절 히딩크 감독은 우리 국민들에게 자기가 추구하는 축구 색깔을 선보였다.

팀 플레이의 골격인 포메이션은 4-4-2로 했고 수비는 일자(一字)백 시스템을 가동했으며 미드필드에는 플레이의 축이 되는 플레이 메이커를 두지 않았다.

이는 1970년대 세계 축구 전술사에 토털 사커로 일획을 그었던 네덜란드 축구의 뿌리를 한국 축구에 접목시키려는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자 백 시스템의 시도는 한국 축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세기 말부터 세계 축구의 조류는 속도와의 전쟁과 공격 축구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한다. 물론 이런 흐름은 세계축구연맹(FIFA)이 주도하고 있다.

FIFA는 더 많은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에 붙잡아 두기 위해 더욱 화려하고 골이 많이 터지는 경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추세는 백 태클 벌칙 강화와 공격적인 팀에 어드밴티지를 많이 주기 위한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90년 이탈리아.94년 미국.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은 스위퍼 시스템을 썼다. 지난해 시드니 올림픽과 아시안컵에서도 역시 홍명보를 최종 수비수로 처지게 해 수비를 두텁게 했다.

스위퍼 시스템을 일관되게 고집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수비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세계 축구의 흐름은 수비-미드필드-공격 라인을 좁히기 위해 압박 축구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 수비 라인을 일자 백 시스템으로 가동했다. 최근 들어서는 공.수의 간격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

수비가 깊으면 깊을수록 최종 수비 라인과 최전방 포워드와의 간격이 넓어져 공.수 전환이 더디게 되고 이는 속도와의 전쟁에서 뒤처져 죽는 결과를 낳게 된다.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세계 최강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던 브라질이 프랑스에 참패한 이유는 호나우두에게 전술 포인트가 집중되며 생긴 전술의 단순화 탓이다.

히딩크가 노르웨이전에서 미드필드에서 플레이의 키를 맡는 특정 선수를 지정하지 않은 이유도 이런 시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네덜란드 축구는 한국이 출전했던 90년대 세차례 월드컵에서 70년대 토털 사커를 바탕으로 어느 나라보다 화려하고 다이내믹하며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쳐 세계 축구팬들을 사로잡았다.

히딩크의 전술과 선수 기용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런 코칭 철학에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따라 갈까 하는 걱정도 든다.

실제로 심재원.홍명보.이민성.김태영으로 짜여진 포백은 뚫리면 단독 찬스를 준다는 부담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지 못했다.

또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인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 정확하지 못한 패스의 답답함은 여전했다. 이는 곧 공.수 전환 속도를 느리게 해 노르웨이에 역전패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노르웨이전은 단순히 경기 결과보다 히딩크가 시도하는 선진 전술과 시스템을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소화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평가가 우선이다.

그리고 시스템 변화에 필요한 시간을 인내해 줄 수 있는 아량도 필요하다.

신문선 <방송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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