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한국의 지성사 10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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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느 분야든 세기의 전환기에 지난 세기를 회고 ·정리하는 것은 백번이고 바람직한 일이다.이 책은 이런 시대적 사명감을 바탕으로 20세기 한국의 지성사를 개괄했다.

본격 통사(通史)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으나 발 빠른 정리 작업이란 평가는 가능하다.

책은 네 시기로 구분하여 시기별 지식인의 과제와 성찰을 담았다. 네 시기란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부터 일제 식민시대까지,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1961년부터 1987년까지,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이른다. 근현대사의 사건을 계기로 한 이런 시대구분에 대해 다분히 산술적이란 혐의가 없지 않다.

이런 무리수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98년 '교수신문'이 창간 7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한국 지성사의 회고와 성찰'이라는 심포지엄에 발표된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다보니 체제의 일관성이 크게 떨어진다.

서울대 장회익(물리학) 교수는 발간사에서 "통일된 시각이 없으며 필자의 주관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게 이 책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시대별 주제 발표자의 글을 보면 한국 지성사의 역동성은 확연히 드러난다. 지성사란 무엇인가.

필자들은 지식인(이 책은 지식인과 지성인을 같은 의미로 혼용했다)의 현실비판 의식을 지성사를 읽는 공통된 키워드로 잡았다.

사회와 지식인들의 부단한 길항(拮抗)작용을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온 중요한 동력으로 본 점도 닮았다.

숙명여대 이만열(한국사학) 교수는 '한말,일제 강점기의 지식인'에서 한말 위정척사론자에서 일제말 신지식인까지의 지식인상을 이념사적으로 정리했다.

서울대 조동일(국문학) 교수는 한국학 중심으로 40∼60년대 '민족 지성'을 재평가했으며, 인하대 정영태(정치학) 교수는 정치학적 관점에서 60∼80년대 '개발연대 지식인'의 비판기능을 다루었다.

87년 민주항쟁에서 지금의 시민사회의 형성까지 '지성의 변조'과정은 서울대 임현진(사회학) 교수가 집필했다. 여성의 힘을 독립된 챕터로 다룬 점은 지난 세기 여성이 지식인으로 당당히 발돋움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떤 유형의 지식인들이 그 시대를 이끌었든, 지금까지 참 지식인들은 그 소임을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이 책은 사회가 전문화하면서 지식인의 비판 기능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필자들이 현재에 가까워질 수록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과 비판을 피하는 것도 그런 흐름의 여파인가.막상 지식인이 당대 동료 지식인의 분석 ·비판에 인색한 채 집단분류식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점은, 오늘날 지식인의 자기모순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하다.

이 대목에서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지식인의 종언'에서 설파한 말이 경구처럼 들린다.

"지성인은 침묵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매여있는 일터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그들은 '지식인들'을 괴롭히고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책임을 스스로 수행하고자 한다"(2백81쪽)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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