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들 삶과 격정 파헤친 '얼음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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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살갗을 발라낼 듯 매서운 칼바람이 막힌 데 없이 들고나는 평지의 모스크바, 방사선으로 쭉쭉 뻗어나간 드넓은 도시 한귀퉁이에 둥지를 튼 사람들은 그들이 극복해야 할 가장 무서운 적으로 추위를 꼽았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이기고 견뎌야 하는 것이 추위뿐이던가. 추위기만 한가.”

러시아가 한국 문학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10여년 전 소련이 붕괴되고 개방화되면서 사회주의 이념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 혹은 끝없는 눈밭과 자작나무 숲의 풍광이 우리 시와 소설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198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와 러시아 고리키 문학대학에서 소설창작 석사과정을 4년간 이수한 소설가 이나미씨.

그가 최근 펴낸 창작집 『얼음가시』(자인 ·7천8백원)에서 러시아는 이제 이방인의 상실에 대한 아픔이나 순백의 풍광을 너머 한국문학에 본격적으로 내면화되고 있다.

러시아를 배경으로한 3편의 중편을 싣고 있는 이 창작집에서 이씨는 위와 같은 표제작 한 부분에서 볼수 있듯 “과연 이들이 이기고 견뎌야 하는 것이 추위뿐이던가”라고 물으며 러시아 사회와 그들 마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표제작은 모스크바로 유학온 노준을 축으로 사랑을 뜨거운 정사로서만 확인하려는 젊은 여성 올랴, 소련 시절의 공훈화가 미하일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버지뻘 미국인 정부를 두고도 누구든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가난과 외로움의 러시아를 탈출하려는 올랴와 가슴 뿌근하게 자부심을 주던 훈장이 노점에서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으로 팔려가고 있는 구겨진 자존심과 궁핍의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미하일.

그리고 소심한 성격과 서툰 러시아어로 소통불능에 빠진 노준을 통해 이씨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여주면서 한국문학속의 러시아를 내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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