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컴퓨터 멈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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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사상 첫 단전조치로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어둠에 싸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전력난이 심화하면서 벌써 네차례나 전력비상조치 3단계가 발동됐고, 양대 전력회사인 태평양가스전기(PG&E)와 에디슨(SEC)은 사실상 파산상태다.

이번 사태는 금융위기로도 번지고 있다. 두 민간 전력회사에 대출해준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같은 대형은행들이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 캘리포니아는 지금 위기상황〓전력 예비율이 1.5% 이하로 떨어져 지역별 단전조치가 취해진 것은 '풍요의 땅' 캘리포니아로선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지난해 12월 철강업체 캘리포니아스틸은 전력난으로 무려 일곱차례나 생산을 중단했고, 인텔사도 최근 전력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새로운 생산라인을 짓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실제로 단전 조치로 캘리포니아만(灣)지역에 위치한 애플컴퓨터사가 2시간 가량 업무를 중단해야 했다. 현재로선 18일 오전 7시(현지시간) 또 단전이 예고돼 있다.

◇ 왜 이 지경 됐나〓전력난은 지역 경제의 성장과 인구증가에 따른 엄청난 전력수요 급증도 원인이지만 1996년 주정부가 단행한 전력시장 민영화정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주정부는 전력시장에서 소비자 이익을 확대한다는 취지에서 독점공급 체제를 자유경쟁체제로 전환하면서 '전력요금 평균 10% 인하, 2002년까지 전력소매가격 동결' 을 발표했다.

이 조치가 시행되면서 기존 전력회사들은 주정부의 권유에 따라 대부분의 발전소.발전설비를 다른 지역의 민간 전기회사들에 매각하고, 이들 발전업체들로부터 전력을 사들여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파는 중간 공급자로 변신했다.

에디슨사의 경우 공급 전기량의 불과 30%만을 현재 자체 생산하고 있다.

민영화된 발전회사들이 경쟁해 전기도매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던 주정부의 당초 예상은 빗나갔다.

지난 봄 이후 천연가스 가격 인상 등의 이유로 전력 도매가격이 10배 이상 폭등했지만 규제에 묶여 소매가격을 올리지 못한 두 전력회사는 막대한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MIT대의 폴 크루그먼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과거 거대한 독점 전력회사들은 가격통제력 덕분에 높은 이윤을 보장 받기 때문에 넉넉한 공급능력을 갖고 예기치 못한 수요에 대처할수 있었던 반면, 규제가 사라진 시장에서는 가격이 유동적이어서 전력업체들은 가격폭락을 우려해 투자를 꺼리면서 전력난과 전기 도매가격 앙등으로 이어졌다" 고 분석했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엄청난 인구증가에도 지역 이기주의로 인해 지난 5년간 새로 건설된 발전소는 단 한군데도 없었고, 발전업체들은 '불완전한' 시장을 악용해 공급을 줄이고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했다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분석이다.

◇ 뒤늦게 대책마련 나선 주정부〓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는 발전소 증설을 위해 10억달러의 기금을 설치하고, 전력소매 대형기업에 대해 평균 15%의 요금인상을 승인했다.

16일에는 주정부가 직접 전기를 다른 주에서 장기 구매해 판매하는 법안까지 통과시켰으며 전력 도매가격 상한선도 검토 중이다.

전기구입 법안에 대한 주지사의 서명이 발효되면 주정부는 앞으로 3년간 ㎾당 5.5센트 이하로 전기를 구입해 공급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기 도매가는 30센트에 달해 장기공급이라도 8.6센트 이상은 돼야 한다는 것이 전기 도매회사들 입장이다.

최근 캘리포니아 주민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다수(66%)는 다시 전력산업을 통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어쨌든 획기적인 개선책이 없는 한 전력수요가 몰리는 올 여름 실리콘밸리의 컴퓨터가 멈춰버리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현지에서 제기되고 있다.

홍수현.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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