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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토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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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선 시대에도 끝장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양민들이 군에 가는 대신 베를 바치던 군역(軍役) 개혁을 두고서다. 1750년 7월 3일 이른 아침 영조는 3정승과 6승지를 대동하고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섰다. 성균관 유생 80여 명과 일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조는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호포론(戶布論)’과 ‘결포론(結布論)’을 놓고 재상·유생·백성 순으로 의견을 내라고 했다. 두 안 모두 양반까지 징수 대상을 확대하되 전자는 가구 단위로, 후자는 토지 단위로 걷자는 차이가 있었다. “호포가 좋다” “결포가 좋다” 설왕설래는 석양 무렵까지 이어졌다. 보다 못한 영조가 새로 하교를 내렸다. 호포에 찬성하면 북쪽, 반대하면 남쪽에 서라 했다. 모든 신료가 남쪽에 섰다. 다음엔 결포에 찬성하면 북쪽, 반대하면 남쪽에 서라 했다. 이번에도 10여 명을 빼곤 대부분 남쪽에 섰다.(박홍갑 등, 『승정원일기』)

끝장토론의 역사는 몽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국 문화에 관대했던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선 종교 토론회가 자주 열렸다. 불교도·이슬람교도·기독교도가 함께 참여하는 토론회에서는 자유로운 발언이 보장됐다. 금기는 단 한 가지. “말다툼을 일으킬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1라운드 토론이 끝나면 2라운드를 준비하며 술을 마셨다. 라운드가 거듭돼도 상대를 설득하거나 개종시킬 순 없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이 더 이상 토론할 수 없을 정도로 취할 때까지 토론회는 계속됐다.

18세기 조선이건 13세기 몽골이건 끝장토론에서 말 그대로 끝장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갈등이 심한 이슈를 놓고 다른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려 애쓴 것 자체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 25일(현지시간)로 예정된 미국 건강보험 개혁 관련 끝장토론도 마찬가지다. TV로 생중계하는 가운데 양당 의원들이 백악관에 모여 한나절 동안 상대 입장을 충분히 들어보자는 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이다. 정치쇼에 불과할 뿐 합의점을 찾기 힘들 것이란 회의론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미국을 양분할 만큼 견해차가 큰 문제이니 나중에 “할 만큼 했다”며 개혁을 밀어붙이자면 그런 쇼라도 필요하단 지적이 많다. 흡사 나란히 달리는 기찻길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던 세종시 문제를 놓고 첫 의총을 연 우리 여당 의원들도 염두에 둬야 할 대목 아닐까.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