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극장 '단성사' 재건축에 부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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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세월이 또 하나의 유산을 삼킨다. 현존하는 극장 중 가장 오래된 단성사가 올 가을 사라진다. 그 자리엔 17층 규모의 복합극장이 들어선다.

1907년에 개관한 단성사는 지난 세월 영화 흥행의 중심이자 명소였다. 한국 영화계의 개척자였던 박승필(1875?~1932)씨가 영화 전문상영관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1918년부터 단성사는 한국인이 즐겨 찾는 극장으로 사랑받았다.

1920년대 서울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서울 토박이들이 주로 살고 있던 북쪽을 북촌(北村), 일본인이 새로운 거리를 이루기 시작하던 진고개(현재의 충무로 부근) 주변을 남촌(南村)이라고 불렀다.

극장도 한국인이 주로 다니던 북촌 극장과 일본인이 다니던 남촌 극장으로 나뉘었다. 그 때 단성사는 우미관.조선극장과 함께 북촌극장의 얼굴이었다. 남촌극장의 중심은 99년에 헐린 국도극장(당시 황금관)이었다.

단성사는 한국영화의 역사다.

한국영화 제작의 중요한 바탕이 됐던 연쇄극(연극 장면에 영화 장면을 삽입한 공연형식)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를 처음 공연했고(1919.10.27), 나운규 원작.주연의 '아리랑' 도 첫 상영(1926.10.1)했다.

매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 로 기념하고 있는 것은 '의리적 구토' 의 첫 공연일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30년대 말엽부터 해방때까지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고, 첨단시설을 앞세운 명치좌나 약초극장 등이 등장하면서 단성사는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대신 '대륙극장' 으로 간판을 달기도 했다.

해방 이후 다시 이름을 찾은 단성사는 영화흥행의 '종로시대' 를 부활시켰다.

한국영화의 흥행 최고 기록을 세웠던 '겨울여자' (77년)나 '장군의 아들' (90년). '서편제' (93년)도 단성사를 거쳐갔다.

그러나 관객의 취향이 바뀌고, 첨단설비를 갖춘 복합상영관이 새로운 극장문화로 자리잡는 현실에서 덩치만 크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옛날 극장들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랜 세월 단성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국도극장은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70㎜영화의 스펙터클을 자랑했던 대한극장도 헐렸다.

나이를 헤아릴 만한 극장은 서울 명동의 옛 국립극장과 스카라극장, 인천의 애관, 대구의 만경관 정도가 고작이다.

수많은 사람의 감동과 추억을 간직해온 옛 극장들이 모두 사라지는 현실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운운하는 시기에 정작 한국영화사를 지켜온 유서 깊은 극장들이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새로 짓는 건물에 한국영화 기념관이라도 넣어 지난 세월을 기억하는 일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하나. 새로운 시대가 지난 시대를 휩쓸어버리고 있다. 통재라!

조희문(영화평론가.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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