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를 다지자] 16. 노하우 전수 안하는 풍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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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1994년 일본 대장성 은행국 공무원들과 실무자급 회의를 한 적이 있다. 금융정책 관련 정보를 교환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일본측은 책상에 앉자마자 거의 육법전서 두께에 달하는 자료를 "우리 은행국의 업무 매뉴얼 및 내규" 라며 내놓았다.

업무 매뉴얼이라고는 오래 전 작성한 얄팍한 내규집이 전부였던 우리로선 부끄러움과 함께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도 전임자들이 축적한 노하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무실 캐비닛이나 자료실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이날 회의는 결국 당초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단순히 현안을 논의하는 수준으로 끝났다.

이런 현상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직장을 옮긴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회사였지만 구체적인 업무 매뉴얼이 없었다.

동료 직원이 알아서 가르쳐 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업무 매뉴얼이나 코드(행동지침)는 선진국 기업에선 기초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그런 개념조차 없는 기업이 수두룩하다.

선진국은 다르다. 95년 미국 UCLA에서 공부할 때였다. 나는 강의실을 돌며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큰 휴지통과 각종 청소도구 및 도구함을 끌고 다녔다. 도구함에는 공구와 휴지.분필 등 소모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미화원들의 업무처리 능력이 마치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 같았다.

특히 갓 들어온 사람도 경력자와 별 차이없이 능력을 발휘해 신기했다. 별로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짧은 시간에 청소와 간단한 수리, 비품 교체까지 꼼꼼히 챙겼다.

미국인 친구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그건 업무 능력과 관계없다.

업무 매뉴얼을 익힌 뒤 철저히 실천할 뿐이다. 매뉴얼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전임자들의 아이디어와 제안이 쌓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금방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고 말해줬다.

구성원의 값진 아이디어들도 담당자만 바뀌면 사장되고, 업무 인수인계도 삽시간에 끝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기초 부실이 쌓이면 결국 조직 경쟁력이 떨어진다. 사람이 바뀌어도 업무에 지장이 없게 해야 한다.

이상묵 <피앤알스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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