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칼럼] 장기판의 졸도 아닌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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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실이란 어리석은 거야. " 다른 사람도 아닌 로널드 레이건의 말이라니 정말 레이건답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따위를 알아서 어쩌자는 거야? 어리석은 짓 그만해! 대강 이런 뜻이렷다.

새해 들어 오늘까지 겨우 열흘 남짓한 사이에 우리는 사실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얘기를 열 번도 더 들은 듯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분들이 '이리 재고 저리 잰 뒤에 '던진 말씀이라 속내를 더듬기가 쉽지 않지만, 한마디로 '줄이면 '사실도 어리석지만 그 사실을 캐는 짓은 한층 더 어리석다는 것이다.

**** '관객' 노릇한 집권당 대표

민주당의 세 의원이 자민련에 입당했다는 기사를 새해 신문에서 읽었다.

정국 안정을 위해 '자발적으로' 행한 결단이란 말이 그대로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게 못할 일도 아니다.

예전 같으면 돈이 오갔다느니, 감투 약속을 받았다느니 온갖 지저분한 얘기들이 뒤따랐겠지만,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그렇게 추잡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겠는가.

그래서 한나라당이 대통령의 국민 기만 행위라고 펄펄 뛸 때도, 자민련 일각에서 더럽고 부끄러운 방법이라고 언성을 높일 때도 정치란 으레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이려니 하고 대범하게 넘겼다.

요컨대 사실 따위를 캐지 않기로 - 어리석지 않기로(!) - 작심한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그렇게 착하고 편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먼저 김중권(金重權) 민주당 대표의 태도가 이상했다.

소속 의원들이 당을 떠나는데 대표라는 사람이 마치 남의 일처럼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서 탈당의 변절(?)을 살신성인의 행위라고까지 치켜세웠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 판에 집권당 대표가 기껏 '관객' 노릇이나 한대서야 공당의 체면이 어찌 바로 서겠는가.

동료 의원들 역시 배신자니 철새 정치인이니 온갖 험악한 언사를 토해내야 '상식' 인데 마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들처럼 숙연하게 전송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일까□ 어리석어도 좋으니 사실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이적(移籍)의원들의 '원상 회복' 을 요구할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야당의 정치공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답변 역시 의원들의 결정을 대통령이 무슨 수로 뒤집느냐는 식의 '모범답안' 수준일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대통령은 야당이 교섭단체 현안에 대해 국회법 표결을 약속하면 "그들을 다시 데려올 수 있다" 고 대답했다.

얼떨결에 혹시 말을 실수한 것이 아닌지 나는 이 대목의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다시 데려오다니? 그렇다면 진짜로 떠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어쩌면 이럴 수가…. 이로써 국회의원을 빌려줬다는 야당의 주장이 사실이고, 그 연출자가 대통령 자신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사실이란 어리석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은 것 이상으로 두려운 것은 대통령의 정치의식이다.

국회의원은 주인 마음대로 싸고 푸는 이삿짐 보따리가 아니며, 정당 총재와 명예총재 역시 이삿짐센터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니 의원을 빌려간 사람도, 의원을 빌려준 사람도 앞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는 사람한테 필요한 것이지, 짐 보따리에 행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보를 물러서 민주당에서 내보내는 것이야 총재의 권한일지라도, 자민련에서 다시 빼오는 것은 민주당 총재의 권한 밖의 일'인데 그것마저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장기판의 졸도 한번 움직이면 무를 수가 없는데 하물며 국회의원의 '자발적인' 선택을 '대통령이 필요하면'강제로 뒤집겠다는 것이니…. 이는 노벨상에 빛나는 인권 대통령이 생각조차 할 일이 아니다.

****총선 民意와 따로 놀아

세명을 보태서 밥상까지 차려줬어도 받아먹지 못한 자민련의 추태는 유구무식(有口無食)이고, 그를 바라보는 국민이 오히려 유구무언의 황당한 심정이다.

강창희(姜昌熙)부총재의 조반(造反)이 역리인지 순리인지 판단은 당분간 보류하자. 국수 사리처럼 '의원 한명 추가' 라고 빗댄 장재식(張在植)의원의 '막가파' 이적에는 입각과 합당 소문 등 벗겨서 어리석을 사실조차 없다.

양당 공조가 대선 공약이라지만 그것은 총선 민의로 심판받았고, 또 공조 여부는 교섭단체 구성과 무관한 사항이다.

총재의 눈짓 한번에 의원이 당을 바꾸고, 명예총재의 기분에 공조가 좌우된다면 정당의 공천이 무슨 소용이고 유권자의 투표가 무엇에 필요하랴. 사실이 어리석을수록 개혁과 쇄신의 열변은 드높은 법인가.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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