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 시대엔 숭모 대상, 마오쩌둥 땐 무덤까지 파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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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08면

2500년 전 공자는 살아 있을 때 ‘실패한 정치가’였다. 꿈을 펼치고자 천하를 떠돌던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을 잃어버린 채 홀로 남았다. 지나던 어떤 이가 자공(子貢)에게 공자를 품평하며 “풀 죽은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다른 모습은 내가 알지 못하겠으나 상갓집 개와 같다는 말은 맞다.” 『사기』 ‘공자세가’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동시대를 살았던 노자(老子)는 공자의 교만함과 덧없는 욕망을 꾸짖었다. 공자는 세상의 조소 속에 세상을 등졌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의 사상적 기반은 유가가 아닌 법가였다. 한(漢)나라가 들어선 지 62년이 지나 황제가 된 무제(武帝)는 통치 기조를 확 바꿨다. 천하통일 대업을 이룬 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공자의 역작 『춘추(春秋)』 전문가였던 동중서(董仲舒)가 “백가를 축출하고 오로지 유가 학술만 존중할 것(罷黜百家, 獨尊儒術)”을 건의했다. 공자는 그제야 중국 사상계를 처음으로 평정했다. 무관의 ‘소왕(素王)’이 제왕의 스승으로 등극한 것이다.

당(唐) 현종은 738년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시호 승격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계속됐다. 송(宋) 진종(眞宗)은 1008년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일컬었다. 원(元)나라에선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명(明)나라에선 ‘지성선사(至聖先師)’란 칭호를 받았다. 청(淸)나라 1645년에는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라는 지식인 최고의 직함을 받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공자 찬양시대는 위기를 맞았다. 비판[批孔]과 존숭[尊孔]의 흐름이 교차했다. 청 말에 태평천국을 이끈 홍수전(洪秀全)이 공자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반란과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게 황제 권력과 기득권을 옹호하는 공자의 사상은 극복 대상일 뿐이었다. 신해혁명(1911년)과 5·4운동(1919년)의 주요 구호 중 하나는 ‘공자를 타도하자(打倒孔家店)’였다. 문화대혁명이 휩쓸던 1971년 ‘권력의 2인자’이던 린뱌오(林彪)가 마오쩌둥(毛澤東)의 배반자로 전락하자 마오는 공자를 옹호한 궈모뤄(郭沫若)를 비판한다. 이런 뜻을 받든 홍위병들은 공자를 린뱌오와 함께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은 장애물로 낙인찍었다.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의 시작이다. 산둥성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 묘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공자 유적이 처참하게 파괴됐다.

존공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무술변법을 주도한 캉유웨이(康有爲)는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를 지어 공자의 도리는 시대와 함께 진화한다(與時進化)며 “옛것에 기대 제도를 고칠 것(托古改制)”을 주장했다. 신해혁명 후 황제에 오르려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공교(孔敎)를 국교로 삼았다. 중국을 통일한 장제스(蔣介石)는 1934년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슬로건으로 삼아 유교 도덕을 고취하는 신생활운동을 주도했다. 국민당은 취푸 공자 묘에서 성대한 공자 탄신 기념식도 열었다. 이렇듯 공자는 시대에 따라 중국 대륙의 통치자들이 즐겨 애용한 ‘정치적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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